민주화 운동의 배후? 김정남
2012. 2. 12. 04:43ㆍ전략 & 컨설팅/국가정책
나도 처음에 이름 때문에 해깔렸으니까... 그 김정남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언론인이자 YS 정권때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을 했던 분이다.
조선일보 글이라서 어디에 조작이 숨어 있는 지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퍼 올 가치가 있는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의 세계라는 것은 너무도 흉악하여, 순수한 사람이 할 일도 못되고, 잘 할 수도 없는 일인 것 같다. 지금 야권이 어떤 모양인가? 마치 노무현 정권 말기에 워낙 민심을 잃어서 누가 대선후보로 나와도 노무현을 이길 수 있다던 그 시절의 야권과 비슷한 것 같다.
이제 숟가락을 얹으려는 아귀다툼만이 보일 뿐...
여야 가릴 것 없이 앞다투어 쏟아내는 선심성 공약들을 보면 어쩌면 나라가 이렇게도 변한게 없나라는 생각이 든다.
조선일보에서 퍼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2/10/2012021001512.html
민주화운동의 代父, 정치판에 일침 날리다
조선일보 글이라서 어디에 조작이 숨어 있는 지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퍼 올 가치가 있는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의 세계라는 것은 너무도 흉악하여, 순수한 사람이 할 일도 못되고, 잘 할 수도 없는 일인 것 같다. 지금 야권이 어떤 모양인가? 마치 노무현 정권 말기에 워낙 민심을 잃어서 누가 대선후보로 나와도 노무현을 이길 수 있다던 그 시절의 야권과 비슷한 것 같다.
이제 숟가락을 얹으려는 아귀다툼만이 보일 뿐...
여야 가릴 것 없이 앞다투어 쏟아내는 선심성 공약들을 보면 어쩌면 나라가 이렇게도 변한게 없나라는 생각이 든다.
조선일보에서 퍼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2/10/2012021001512.html
민주화운동의 代父, 정치판에 일침 날리다
"들떠있는 野나 가라앉는 與나 나라 근심거리"
"평생 싸웠던 박정희에 원망은 없다… 보릿고개 없앤건 인정"
‘해위 윤보선의 뒤에 있었다. 김영삼의 뒤에도, 이돈명 홍성우 변호사의 뒤에도, 함세웅 신부의 뒤에도, 창작과 비평사에도,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에도 항상 있었다. 찾을 수는 없지만, 그는 있어야 할 때, 있어야 할 곳에 항상 있었다.’
시인 고은의 ‘만인보 12’에 실린 ‘김정남’이란 제목의 시다. 김영삼 정권 초기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으로 잠깐 대중의 시야에 들어왔던 그는 이후 20년 가까이 칩거생활을 해왔다. 민주화 운동 언저리에 있었던 것만으로도 보상금을 받아내고 의원 배지를 달던 ‘민주정권’ 시절에도 그의 이름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김수환 추기경은 생전에 김정남(金正男ㆍ70)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고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민주화 운동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자신을 드러내 앞에 나서지도 않았고, 또 내세운 일도 없다.”
그를 항상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민주화 운동의 대부'다. 홍성우 변호사는 그를 '민주화 운동의 비밀병기'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실은 고은의 표현대로 '배후인물'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하다. 스물세살이던 1964년 6·3사태 때 '배후인물'로 구속돼 감옥살이를 한 이후 87년 6·29선언이 나오기까지 그는 30년 가까이 수배와 도피생활 그리고 투옥을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배후에서' 각종 민주화운동 단체들을 결성하고 인혁당사건의 진상조사 및 폭로, 김지하 양심선언 발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폭로 등을 주도했다.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사를 쓴다면 그는 적어도 서너 장(章)은 장식할 것이다.
그 김정남이 노무현 정권의 절정기이던 2005년 여름, 30년 민주화 운동의 역정을 담은 '진실, 광장에 서다'라는 책을 내면서 머리말에 던진 질문은 '과연 민주화는 되었는가'였다. 어렵사리 성사돼 두 번에 걸쳐 만난 김정남이 2012년 겨울, 인터뷰 내내 가장 많이 입에 올린 문장은 "지금 이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였다.
◇ "민주진영, 미래와 세계를 보지 못하고 있다."
―2012년은 총선과 대선이 열리는 중요한 한 해다.
"얼마 전에 보니 백낙청 교수가 '2013년 체제'라는 말을 썼더라. 아마 요즘 분위기 같아서는 진보진영이나 야당 쪽에서 집권가능성이 보이니 낙관적 기대를 갖는 것 같은데 난 대단히 걱정스럽게 내년을 보고 있다. 여야 어느 쪽도 집권 자체에만 매달려 있지 집권 이후 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겠다는 고민이나 비전이 없다. 이럴 때일수록 진지하게 고민하고 몸부림치고 연구하고 토론해야 하는데 순전히 패거리 싸움뿐이다." --> 공감 백배다.
―평생 민주화 운동을 해온 입장에서 민주진영이라는 민주통합당을 응원할 것 같은데.
"민주화 운동이라는 게 큰 틀에서 보면 경주마처럼 좌우를 보지 못하고 민주화 하나만 바라보고 달려왔다. 그래서 미래는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고 세계는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에 대해 애써 외면하거나 제대로 보지 못한 게 사실이다. 경륜은 없고 오직 투쟁했다는 하나로 버텨왔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상당히 우왕좌왕했던 것도 국가경영에 관한 충분한 고뇌와 토론 없이 집권한 때문이다. 실은 이명박 정부의 등장으로 민주진영은 이 문제를 충분히 반성하고 고뇌했어야 하는데 결과적으로 이명박 정부에 대한 민심이반이 진보진영의 무능과 경륜 없음, 부도덕함을 성찰할 기회를 없애버렸다. 저쪽이 워낙 부도덕하니 자신들은 반성할 필요가 없다, 뭐 그런 것 같다. 반(反)이명박 정서 덕분에 민주통합당이 들떠 있다." --> 역시 공감 백배. 김대중 노무현 정권때 어이 없는 아마츄어리즘에 치를 떨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 후 10년의 공백을 깨고 복귀한 이명박 정권에서 소위 보수라는 수구세력의 무능력은 훨씬 더 심하다는 것을 보게 되었지만...
―민주화 투사의 입에서 미래와 세계라는 말을 들으니 조금은 어색하다.
"제대로 된 진보는 말 그대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처음에는 반미 좀 하면 어떠냐고 했지만 학습효과를 통해 미래와 세계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한미FTA가 바로 그것이다. 노 대통령으로서는 고심 끝에 때에 따라 그렇게 돌아서라도 가는 것이 더디지만 진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학습효과는 진보진영의 진보를 위해 대단히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민주통합당은 과거로 돌아가려 하고 있다. 노 대통령이 얼마나 고뇌에 차서 그 과정에 도달했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무조건 반대만을 외친다. 특히 당시 비서실장이었고 현재 대권후보로 거론되는 문재인씨는 이 문제에 대해 말을 바꿔버렸다. 패거리논리에 밀린 것이다. 국가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이 그래서는 안된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 역시 조선일보인가? 아뭏든, 노무현이 추진했던 FTA와 이명박 정권이 추진한 FTA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김정남씨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면 조선일보가 살짝 발언을 왜곡했던지...) 국가지도자는 말을 바꾸면 안된다? 그건 아니지...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FTA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그 수많은 독소 조항들.. 평등하지 못하고 우리에게만 불리하게 되어 있는 내용 때문인데...
◇"내가 할 일은 오직 이 땅에서 군사독재를 몰아내는 것뿐이었다."
―서울대 정치학과 4학년 때인 1964년 6·3사태 배후조종 혐의로 투옥됐다.
"1961년 4월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대학교에 진학했다. 당시만 해도 이승만 독재를 몰아낸 4·19의 뒤끝이라 새로운 민족사의 진운이 열릴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꿈에 부풀어 있었다. 당연히 정치를 해서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려는 꿈도 갖고 있었겠지. 그런데 한 달 만에 군사쿠데타를 만나게 되었다. 그 순간 우리의 꿈과 희망도 사라졌다. 내가 할 일은 오직 군사독재와의 투쟁이요 이 땅에서 군사독재를 몰아내는 것이라 결심했다."
―이명박 대통령도 6·3세대 아닌가?
"고려대에서는 최장집 서진영 박정훈 조홍규 이인식 등이 운동권의 중심인물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상대 학생회장으로 참여했다 해서 한 두 달 고생했을 거다. 그때 감옥에서도 봤다. 그 뒤엔 특별하게 활동한 건 없다."
―6·3사태란 한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을 반대한 것이다.
"당시 우리가 진정 걱정한 것은 굴욕적인 외교형식 못지않게 그로 인한 영구분단이었다. 당시만 해도 전쟁이 끝난 지 10년 남짓밖에 안 지났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통일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만 독자적으로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할 경우 분단이 고착화될 것으로 보았다. 실은 그 점이 더 큰 관심사였다. 그 회담은 분명 굴욕적이었지만 돌이켜보면 불가피한 면도 있었다. 산업화에 긍정적 기여를 한 것도 사실이고."
―1971년부터 본격 재야(在野)운동에 뛰어든다.
“박정희는 1969년 10월 3선개헌으로 다시 한 번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넜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민주주의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심부름을 하며 1971년 4월 김재준 목사, 이병린 변호사, 함석헌 선생, 천관우 선생 등이 이끄는 민주수호국민협의회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이것이 재야 민주화운동 단체의 첫 출범이다.”
―이듬해 10월 유신이 선포되면서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의 강도는 더 심해졌다.
“교회와 대학가를 중심으로 저항의 움직임이 조직화되고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박정희는 긴급조치를 발동했다. 1974년 1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의 ‘긴조(긴급조치)시대’다. 그중에서도 가장 살벌했던 것이 1974년 4월3일 발표된 긴급조치4호였다.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1204명이 검거돼 그중 180명이 4호 위반으로 구속기소됐다. 더욱 통탄스러운 일은 인혁당(인민혁명당)이라는 가공의 용공단체를 고문으로 조작하여 이 단체가 민청학련을 배후조종했다고 덮어씌운 것이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김지하, 이철, 유인태, 김병곤 등 6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인혁당 사건으로는 이수병· 서도원·도예종 등 7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민청학련 관련자 중 여정남을 제외한 나머지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목숨을 구했고 인혁당 관련자 7명은 결국 세상을 떠났다. 난 이들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다.”
―쉽지 않았겠다.
“일단 용공(容共)으로 몰리면 주변으로부터 처참하게 외면당한다. 그들을 돕거나 가까이하다가는 함께 용공으로 몰리기 때문이다. 심지어 민청학련 구속자 가족들도 ‘인혁당 문제를 거론하면 민청학련 사건의 해결이 복잡해진다’며 인혁당 사건 가족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그래서 나는 이 사건의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최대한 자료를 수집해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 이 Frame은 이승만이 재미본 이후 계속 효과적으로 대한민국의 근대사를 지배해 왔다. '반정부= 용공' 이게 참... 얼마나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지... 적어도 박근혜씨는 지금처럼 아버지의 그림자를 기반으로 대통령이 되려 한다면 아버지가 한국 역사와 사회에 드리운 그림자, 특히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사과를 해야 한다. 그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한 적도 있다. 이미 법원에서도 그것이 조작된 사건임을 분명히 하지 않았나?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화해는 그런 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원망이 깊겠다.
“원망은 없다. 박정희가 보릿고개를 없애고 산업화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은 인정한다.-->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대로 ‘정의가 없는 나라는 강도 집단과 뭐가 다른가’ --> 끄덕끄덕.. 라는 물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박종철 고문치사의 진상 사건도 폭로했다.
“(당시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이부영 전 의원이 교도소 용지에 갈겨 쓴 편지의 복사본을 보여주며) 이게 당시 이부영이 나한테 보내온 박종철 고문사건이 조작되었다는 내용이다. 이걸 내가 받아서 함세웅 신부에게 전달했고 87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광주민주항쟁 7주년 추모미사 때 공개함으로써 세상에 진실이 알려진 것이다. 당시 보안계장이던 안유라는 사람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처럼 민주화 과정에는 알게 모르게 숨어서 기여한 인물이 너무나도 많다. 민주화를 민주화운동가들만의 공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민주화 보상금도 신청하지 않았다.
“보상받자고 운동한 것 아니다. 김대중이 대통령 되고 이해찬이 총리 된 것이 최고의 보상 아닌가? 민주진영의 부끄러운 대목이다.” -->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 같다. 언제나 묵묵하게 자기 일을 감당했던 사람은 결국 보상받지 못하고 소외된다. 보상받자고 운동한 것처럼 보이는 자들이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말아 먹었다. 이게 정치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 김수환 추기경 같은 분이 계셨다는 것은 행운이자 행복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인연이 깊다. 유일한 고위공직인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으로 임명한 것도 김 전 대통령이다.
“앞서 말한 민주수호국민협의회는 도청 미행 등으로 괴멸돼버렸다. 그래서 통일사회당을 하던 김철과 내가 74년말에 만나 민주회복국민회의라는 단체를 만들기로 하고 김영삼·김대중·양일동 등 당시의 야당지도자들을 끌어들였다. 그때 내가 YS를 맡아 새벽에 찾아가 동참을 부탁했다. 그게 첫 만남이다. 그후 이런저런 글을 쓸 일이 있으면 나에게 부탁하곤 했다. 당시 야당에는 성명서 하나 쓸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 서울대나 연고대 출신들도 많았을 텐데 이해가 안가는 대목이긴 하다. ;;;; 당장, 김정남씨도 서울대 정치학과 아닌가 ;;; 하긴 뭐 30대에 갓 진입한 사람에게 글을 부탁했다는 것도, 증거이긴 하겠다만... 그렇게 무식한 인간들이 민주화를 위해 뭉쳤다는 것도 역사의 진실이자, 아이러니일 수 있겠다. 80년대 들어 더 가까워졌다. 주요사안에 대한 재야의 시각 등이 궁금하면 불러서 이것저것 묻곤 했다. 1982년 정치활동이 금지돼 가택연금돼 있을 때 미국에서 먼저 나온 책 ‘나와 내 조국의 진실’은 상당부분 내가 썼다. 83년 단식을 할 때 그분이 발표했던 ‘국민에게 드리는 글’도 내가 작성해서 대학동기이자 비서실장이던 김덕룡에게 전달하면 그것을 김덕룡의 부인이 손명순 여사에게 전해서 YS에게 전달했다. 그 밖에도 YS의 발언이나 성명 중에 내가 쓴 게 많다. 고스트 라이터였다고 할까?”
―통념으로 보면 재야운동가였으니 김대중 전 대통령과 더 가까웠을 것 같은데.
“DJ는 신중하고 현명한 사람이다. 뭔가 앞장서서 하는 일이 없었다. 대신 YS는 자신에 대한 박해가 있으면 폭발적으로 반응했다. --> 흥미로운 인물평. 내 개인적인 기준으로, 이승만, MB 이후로 YS가 최악의 대통령 3위로 올라 있다. 위험할 정도의 멍청함과 단순무식함 때문에... 이런 인간이 DJ와 싸울 수 있었던 힘은 '의리'였구나. 단식할 때 나는 말렸다. 간디의 단식이 성공한 것은 적어도 인간의 생명을 존중할 줄 아는 영국 정부를 상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지만 전두환 정권을 상대로 단식을 한다는 것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라 했다. 그때 YS는 ‘죽어도 좋다’고 했다.”
―노선보다는 인간적 매력 때문에 가까워졌단 말인가?
“연금 중일 때 기름이 없어서 다른 방은 냉방이고 자기 방만 미지근하게 해놓고 생활했다. 그렇게 어려웠는데도 단식 끝나고 만나자고 해서 봤더니 10만원을 찔러주더라. 한마디로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다.”
―김수환 추기경과도 인연이 각별했다.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지학순 주교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연행됐다가 하루 만에 풀려난 뒤 보름 후 유신헌법은 무효라고 양심선언을 해서 다시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정작 지학순 주교가 감옥에 들어갔는데 천주교 쪽에는 면회는 어떻게 하고 책과 돈은 어떻게 넣는지, 즉 옥바라지를 한다는 게 어떤 건지를 전혀 몰랐다. 그래서 내가 옥바라지 교사역할을 했는데 그 이야기가 추기경의 귀에 들어가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명동성당 근처에 세계챔피언 김기수가 하던 챔피언다방이 있었는데 그 위에 가톨릭 여학생회관이 있었다. 그곳에서 추기경을 만나 세상 돌아가는 얘기나 민주화운동 이야기를 전해드렸다. 3김 3김 하는데 내가 볼 때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에서 3김에 반드시 포함시켜야 할 분이 바로 김 추기경이다. 그분은 사랑하되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위엄이 있되 가파르지 않으셨다. 우리나라에 그런 분이 계셨다는 것은 행운이며 행복이었다.”
―최근 세상을 떠난 신상우 국회부의장과도 가까웠다.
“그 양반은 내가 건달생활을 하던 1971년 지인의 소개로 만났다. 그때 막 야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는데 국회 본회의 질의할 내용을 나에게 부탁했다. 당시 경기도 광주에 서 폭동이 일어났다. 양택식 서울시장이 용산역 근처 빈민가를 깡패를 동원해 강제철거한 다음 그 사람들을 광주와 성남에 갖다버리다시피 했다. 그때 내가 이 문제를 정리해서 준비해줬는데 국회 데뷔전이라고 할 수 있는 본회의 질의에서 오직 이 문제 하나만을 제기했다. 지금 생각하면 논리는 이랬다. ‘우리의 판자촌은 서구의 슬럼과 다르다. 슬럼은 도시 패배자들의 집단이지만 우리의 판자촌은 시골에서 저곡가 정책으로 내몰려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올라왔지만 도덕적으로 건강하고 일할 의욕에 불타고 있다. 그런데 정부가 잘못해 이들을 행정살인한 것이다’. 그때부터 최근까지 인연을 이어온 거다. 내가 집안 걱정 안 하고 70년대와 80년대 내내 민주화운동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넉넉한 생활비를 몰래 지원해준 덕분이다. 그 돈으로 많은 수배자를 도울 수 있었다. 지금의 내가 그나마 ‘민주화의 대부’니 ‘민주화의 비밀병기’니 하는 과찬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신 부의장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대로 가면 새누리당은 침몰한다.”
―김영삼이나 신상우와의 인연 때문인지 지금의 새누리당에도 비판적 애정이 있다. 권영세 사무총장은 어디선가 자신의 멘토를 김정남이라 했던데.
“그보다는 민주화가 된 마당에 더 이상 민주 반민주로 나눠서 사고할 필요는 없다. 어느 당이 나라의 가야 할 길을 제대로 고민하고 있는지를 지켜볼 뿐이다. 최근 새누리당으로 이름을 바꾼 한나라당 사정은 한 마디로 처참한 수준이다. 이것은 그들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도 불행하다. 지금대로 가면 새누리당은 참패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 만큼 붕괴할 것이다. 그러면 방향도 없이 들썩거리는 민주통합당 세상이 될 테고 새누리당의 역량으로는 제대로 된 견제자 역할을 할 수 없다. 나라 꼴이 어떻게 되겠는가?”
―오랫동안 한국정치를 걱정하며 지켜본 안목으로 볼 때 새누리당은 이대로 침몰할 것으로 보나?
“지금처럼 박근혜만 쳐다보고 있으면 그렇게 되지 않겠는가? 박근혜는 되어서도 안 되고 될 수도 없다고 본다. 되어서 안 되는 이유는 시대의 큰 흐름에 역행하는 인물이다. 중동에서도 민주화가 이뤄질 정도로 자유와 민주를 향한 물결은 세계사의 대세다. 박근혜는 아버지의 유산 이외에 아무것도 보여준 것이 없다. 또 얼마나 폐쇄적이고 권위주의적인가? 이런 상태로 대선에 갈 경우 그것은 다시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를 되살릴 것이고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것이다.”
―될 수 없다고 보는 이유는 뭔가?
“그전까지는 신비감이라도 있었는데 비대위와 공심위 인선을 통해 그가 사람 보는 능력이 드러났다. 좋은 기회를 놓쳤다. 베스트 코리아를 만들 수 있는 각 분야의 최고 인재들을 찾아내고 또 공정한 인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어야 했다. 그런데 누가 봐도 실패작이다. 치마폭 사람들만 골랐다. 이제라도 그 당 의원들은 제대로 고민하고 몸부림쳐서 한국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인물이 누구인지를 두고서 치열한 논쟁을 벌여야 한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러면 문재인도 별로고 박근혜도 별로라는 건데. 우리 국민은 어떤 인물을 다음 지도자로 뽑아야 한다고 생각하나.
“지금 우리나라가 당면한 핵심과제들을 자신의 머리로 고민하고 자기 언어로 풀어내어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질 수 있는 헌신성이 있어야 한다. --> 이거 중요한 말이다. 고래로, 정치가들은 자신의 머리와 자신의 언어가 없어왔다. 이것은 투사와 정치가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것 같다. 자신이 그 일로 불이익을 볼 줄 알면서도 하는 사람은 투사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 자기가 개인적 이익을 볼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사람은 정치가다. 지금 야당에 투사가 있는가? 적어도 지도부 중에는 없는 것 같다. 이 나라가 고민이다. 국민을 통합할 수 있는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 박근혜는 세종시 문제에서 보듯 국가백년대계보다는 개인의 신의를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은 그 뜻이다. 잘 보라. 언제부터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시작되었는지. 결국 세종시 문제에서 정운찬 총리를 앞세우고 자신은 비겁하게 뒤로 물러섰다. 그때 당당한 결단을 했다면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점에서는 오히려 정 총리에게 점수를 줄 필요가 있다.”
―그래도 직접 정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유혹도 있었을 테고.
“어릴 때는 정치인에 대한 꿈이 있었다. 그러나 암흑 속을 30년간 숨어 살다 보니 어느새 50이 돼 있었다. 정치는 나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경세가(經世家)로 불러준다면 만족한다.”
‘민주화운동의 대부’ 김정남은 인터뷰를 마치며 꼭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내가 굳이 진보라고 한다면 진보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 후.. 가슴에 와 닿기는 하지만, 이런 마인드로는 정권을 잡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사랑받는 것 보다는 다른 것들이거든요... 사실은 사랑받는 게 중요한 건데, 그걸 왜 잃고서야 깨닫게 될까? 본질은 사랑이었는데 말이다.. 직정적으로 널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진정으로 깊이 있게 사랑하는 것은 어렵다. 노무현도 직정적으로 사랑한다 수준에서 조금씩 진정 사랑한다는 것이 뭔가를 깨달아갈 때쯤 떠나버린 것 아닐까?” 공자의 제자 번지가 공자에게 인(仁)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공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人)”이라고 했다. 자료를 보니 김정남이 존경하는 인물 3인은 김구와 넬슨 만델라 그리고 공자였다.
시인 고은의 ‘만인보 12’에 실린 ‘김정남’이란 제목의 시다. 김영삼 정권 초기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으로 잠깐 대중의 시야에 들어왔던 그는 이후 20년 가까이 칩거생활을 해왔다. 민주화 운동 언저리에 있었던 것만으로도 보상금을 받아내고 의원 배지를 달던 ‘민주정권’ 시절에도 그의 이름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김수환 추기경은 생전에 김정남(金正男ㆍ70)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고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민주화 운동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자신을 드러내 앞에 나서지도 않았고, 또 내세운 일도 없다.”
그를 항상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민주화 운동의 대부'다. 홍성우 변호사는 그를 '민주화 운동의 비밀병기'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실은 고은의 표현대로 '배후인물'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하다. 스물세살이던 1964년 6·3사태 때 '배후인물'로 구속돼 감옥살이를 한 이후 87년 6·29선언이 나오기까지 그는 30년 가까이 수배와 도피생활 그리고 투옥을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배후에서' 각종 민주화운동 단체들을 결성하고 인혁당사건의 진상조사 및 폭로, 김지하 양심선언 발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폭로 등을 주도했다.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사를 쓴다면 그는 적어도 서너 장(章)은 장식할 것이다.
그 김정남이 노무현 정권의 절정기이던 2005년 여름, 30년 민주화 운동의 역정을 담은 '진실, 광장에 서다'라는 책을 내면서 머리말에 던진 질문은 '과연 민주화는 되었는가'였다. 어렵사리 성사돼 두 번에 걸쳐 만난 김정남이 2012년 겨울, 인터뷰 내내 가장 많이 입에 올린 문장은 "지금 이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였다.
◇ "민주진영, 미래와 세계를 보지 못하고 있다."
―2012년은 총선과 대선이 열리는 중요한 한 해다.
"얼마 전에 보니 백낙청 교수가 '2013년 체제'라는 말을 썼더라. 아마 요즘 분위기 같아서는 진보진영이나 야당 쪽에서 집권가능성이 보이니 낙관적 기대를 갖는 것 같은데 난 대단히 걱정스럽게 내년을 보고 있다. 여야 어느 쪽도 집권 자체에만 매달려 있지 집권 이후 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겠다는 고민이나 비전이 없다. 이럴 때일수록 진지하게 고민하고 몸부림치고 연구하고 토론해야 하는데 순전히 패거리 싸움뿐이다." --> 공감 백배다.
―평생 민주화 운동을 해온 입장에서 민주진영이라는 민주통합당을 응원할 것 같은데.
"민주화 운동이라는 게 큰 틀에서 보면 경주마처럼 좌우를 보지 못하고 민주화 하나만 바라보고 달려왔다. 그래서 미래는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고 세계는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에 대해 애써 외면하거나 제대로 보지 못한 게 사실이다. 경륜은 없고 오직 투쟁했다는 하나로 버텨왔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상당히 우왕좌왕했던 것도 국가경영에 관한 충분한 고뇌와 토론 없이 집권한 때문이다. 실은 이명박 정부의 등장으로 민주진영은 이 문제를 충분히 반성하고 고뇌했어야 하는데 결과적으로 이명박 정부에 대한 민심이반이 진보진영의 무능과 경륜 없음, 부도덕함을 성찰할 기회를 없애버렸다. 저쪽이 워낙 부도덕하니 자신들은 반성할 필요가 없다, 뭐 그런 것 같다. 반(反)이명박 정서 덕분에 민주통합당이 들떠 있다." --> 역시 공감 백배. 김대중 노무현 정권때 어이 없는 아마츄어리즘에 치를 떨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 후 10년의 공백을 깨고 복귀한 이명박 정권에서 소위 보수라는 수구세력의 무능력은 훨씬 더 심하다는 것을 보게 되었지만...
―민주화 투사의 입에서 미래와 세계라는 말을 들으니 조금은 어색하다.
"제대로 된 진보는 말 그대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처음에는 반미 좀 하면 어떠냐고 했지만 학습효과를 통해 미래와 세계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한미FTA가 바로 그것이다. 노 대통령으로서는 고심 끝에 때에 따라 그렇게 돌아서라도 가는 것이 더디지만 진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학습효과는 진보진영의 진보를 위해 대단히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민주통합당은 과거로 돌아가려 하고 있다. 노 대통령이 얼마나 고뇌에 차서 그 과정에 도달했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무조건 반대만을 외친다. 특히 당시 비서실장이었고 현재 대권후보로 거론되는 문재인씨는 이 문제에 대해 말을 바꿔버렸다. 패거리논리에 밀린 것이다. 국가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이 그래서는 안된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 역시 조선일보인가? 아뭏든, 노무현이 추진했던 FTA와 이명박 정권이 추진한 FTA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김정남씨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면 조선일보가 살짝 발언을 왜곡했던지...) 국가지도자는 말을 바꾸면 안된다? 그건 아니지...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FTA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그 수많은 독소 조항들.. 평등하지 못하고 우리에게만 불리하게 되어 있는 내용 때문인데...
◇"내가 할 일은 오직 이 땅에서 군사독재를 몰아내는 것뿐이었다."
―서울대 정치학과 4학년 때인 1964년 6·3사태 배후조종 혐의로 투옥됐다.
"1961년 4월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대학교에 진학했다. 당시만 해도 이승만 독재를 몰아낸 4·19의 뒤끝이라 새로운 민족사의 진운이 열릴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꿈에 부풀어 있었다. 당연히 정치를 해서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려는 꿈도 갖고 있었겠지. 그런데 한 달 만에 군사쿠데타를 만나게 되었다. 그 순간 우리의 꿈과 희망도 사라졌다. 내가 할 일은 오직 군사독재와의 투쟁이요 이 땅에서 군사독재를 몰아내는 것이라 결심했다."
―이명박 대통령도 6·3세대 아닌가?
"고려대에서는 최장집 서진영 박정훈 조홍규 이인식 등이 운동권의 중심인물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상대 학생회장으로 참여했다 해서 한 두 달 고생했을 거다. 그때 감옥에서도 봤다. 그 뒤엔 특별하게 활동한 건 없다."
―6·3사태란 한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을 반대한 것이다.
"당시 우리가 진정 걱정한 것은 굴욕적인 외교형식 못지않게 그로 인한 영구분단이었다. 당시만 해도 전쟁이 끝난 지 10년 남짓밖에 안 지났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통일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만 독자적으로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할 경우 분단이 고착화될 것으로 보았다. 실은 그 점이 더 큰 관심사였다. 그 회담은 분명 굴욕적이었지만 돌이켜보면 불가피한 면도 있었다. 산업화에 긍정적 기여를 한 것도 사실이고."
―1971년부터 본격 재야(在野)운동에 뛰어든다.
“박정희는 1969년 10월 3선개헌으로 다시 한 번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넜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민주주의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심부름을 하며 1971년 4월 김재준 목사, 이병린 변호사, 함석헌 선생, 천관우 선생 등이 이끄는 민주수호국민협의회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이것이 재야 민주화운동 단체의 첫 출범이다.”
―이듬해 10월 유신이 선포되면서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의 강도는 더 심해졌다.
“교회와 대학가를 중심으로 저항의 움직임이 조직화되고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박정희는 긴급조치를 발동했다. 1974년 1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의 ‘긴조(긴급조치)시대’다. 그중에서도 가장 살벌했던 것이 1974년 4월3일 발표된 긴급조치4호였다.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1204명이 검거돼 그중 180명이 4호 위반으로 구속기소됐다. 더욱 통탄스러운 일은 인혁당(인민혁명당)이라는 가공의 용공단체를 고문으로 조작하여 이 단체가 민청학련을 배후조종했다고 덮어씌운 것이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김지하, 이철, 유인태, 김병곤 등 6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인혁당 사건으로는 이수병· 서도원·도예종 등 7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민청학련 관련자 중 여정남을 제외한 나머지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목숨을 구했고 인혁당 관련자 7명은 결국 세상을 떠났다. 난 이들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다.”
―쉽지 않았겠다.
“일단 용공(容共)으로 몰리면 주변으로부터 처참하게 외면당한다. 그들을 돕거나 가까이하다가는 함께 용공으로 몰리기 때문이다. 심지어 민청학련 구속자 가족들도 ‘인혁당 문제를 거론하면 민청학련 사건의 해결이 복잡해진다’며 인혁당 사건 가족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그래서 나는 이 사건의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최대한 자료를 수집해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 이 Frame은 이승만이 재미본 이후 계속 효과적으로 대한민국의 근대사를 지배해 왔다. '반정부= 용공' 이게 참... 얼마나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지... 적어도 박근혜씨는 지금처럼 아버지의 그림자를 기반으로 대통령이 되려 한다면 아버지가 한국 역사와 사회에 드리운 그림자, 특히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사과를 해야 한다. 그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한 적도 있다. 이미 법원에서도 그것이 조작된 사건임을 분명히 하지 않았나?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화해는 그런 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원망이 깊겠다.
“원망은 없다. 박정희가 보릿고개를 없애고 산업화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은 인정한다.-->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대로 ‘정의가 없는 나라는 강도 집단과 뭐가 다른가’ --> 끄덕끄덕.. 라는 물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박종철 고문치사의 진상 사건도 폭로했다.
“(당시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이부영 전 의원이 교도소 용지에 갈겨 쓴 편지의 복사본을 보여주며) 이게 당시 이부영이 나한테 보내온 박종철 고문사건이 조작되었다는 내용이다. 이걸 내가 받아서 함세웅 신부에게 전달했고 87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광주민주항쟁 7주년 추모미사 때 공개함으로써 세상에 진실이 알려진 것이다. 당시 보안계장이던 안유라는 사람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처럼 민주화 과정에는 알게 모르게 숨어서 기여한 인물이 너무나도 많다. 민주화를 민주화운동가들만의 공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민주화 보상금도 신청하지 않았다.
“보상받자고 운동한 것 아니다. 김대중이 대통령 되고 이해찬이 총리 된 것이 최고의 보상 아닌가? 민주진영의 부끄러운 대목이다.” -->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 같다. 언제나 묵묵하게 자기 일을 감당했던 사람은 결국 보상받지 못하고 소외된다. 보상받자고 운동한 것처럼 보이는 자들이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말아 먹었다. 이게 정치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 김수환 추기경 같은 분이 계셨다는 것은 행운이자 행복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인연이 깊다. 유일한 고위공직인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으로 임명한 것도 김 전 대통령이다.
“앞서 말한 민주수호국민협의회는 도청 미행 등으로 괴멸돼버렸다. 그래서 통일사회당을 하던 김철과 내가 74년말에 만나 민주회복국민회의라는 단체를 만들기로 하고 김영삼·김대중·양일동 등 당시의 야당지도자들을 끌어들였다. 그때 내가 YS를 맡아 새벽에 찾아가 동참을 부탁했다. 그게 첫 만남이다. 그후 이런저런 글을 쓸 일이 있으면 나에게 부탁하곤 했다. 당시 야당에는 성명서 하나 쓸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 서울대나 연고대 출신들도 많았을 텐데 이해가 안가는 대목이긴 하다. ;;;; 당장, 김정남씨도 서울대 정치학과 아닌가 ;;; 하긴 뭐 30대에 갓 진입한 사람에게 글을 부탁했다는 것도, 증거이긴 하겠다만... 그렇게 무식한 인간들이 민주화를 위해 뭉쳤다는 것도 역사의 진실이자, 아이러니일 수 있겠다. 80년대 들어 더 가까워졌다. 주요사안에 대한 재야의 시각 등이 궁금하면 불러서 이것저것 묻곤 했다. 1982년 정치활동이 금지돼 가택연금돼 있을 때 미국에서 먼저 나온 책 ‘나와 내 조국의 진실’은 상당부분 내가 썼다. 83년 단식을 할 때 그분이 발표했던 ‘국민에게 드리는 글’도 내가 작성해서 대학동기이자 비서실장이던 김덕룡에게 전달하면 그것을 김덕룡의 부인이 손명순 여사에게 전해서 YS에게 전달했다. 그 밖에도 YS의 발언이나 성명 중에 내가 쓴 게 많다. 고스트 라이터였다고 할까?”
―통념으로 보면 재야운동가였으니 김대중 전 대통령과 더 가까웠을 것 같은데.
“DJ는 신중하고 현명한 사람이다. 뭔가 앞장서서 하는 일이 없었다. 대신 YS는 자신에 대한 박해가 있으면 폭발적으로 반응했다. --> 흥미로운 인물평. 내 개인적인 기준으로, 이승만, MB 이후로 YS가 최악의 대통령 3위로 올라 있다. 위험할 정도의 멍청함과 단순무식함 때문에... 이런 인간이 DJ와 싸울 수 있었던 힘은 '의리'였구나. 단식할 때 나는 말렸다. 간디의 단식이 성공한 것은 적어도 인간의 생명을 존중할 줄 아는 영국 정부를 상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지만 전두환 정권을 상대로 단식을 한다는 것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라 했다. 그때 YS는 ‘죽어도 좋다’고 했다.”
―노선보다는 인간적 매력 때문에 가까워졌단 말인가?
“연금 중일 때 기름이 없어서 다른 방은 냉방이고 자기 방만 미지근하게 해놓고 생활했다. 그렇게 어려웠는데도 단식 끝나고 만나자고 해서 봤더니 10만원을 찔러주더라. 한마디로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다.”
―김수환 추기경과도 인연이 각별했다.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지학순 주교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연행됐다가 하루 만에 풀려난 뒤 보름 후 유신헌법은 무효라고 양심선언을 해서 다시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정작 지학순 주교가 감옥에 들어갔는데 천주교 쪽에는 면회는 어떻게 하고 책과 돈은 어떻게 넣는지, 즉 옥바라지를 한다는 게 어떤 건지를 전혀 몰랐다. 그래서 내가 옥바라지 교사역할을 했는데 그 이야기가 추기경의 귀에 들어가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명동성당 근처에 세계챔피언 김기수가 하던 챔피언다방이 있었는데 그 위에 가톨릭 여학생회관이 있었다. 그곳에서 추기경을 만나 세상 돌아가는 얘기나 민주화운동 이야기를 전해드렸다. 3김 3김 하는데 내가 볼 때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에서 3김에 반드시 포함시켜야 할 분이 바로 김 추기경이다. 그분은 사랑하되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위엄이 있되 가파르지 않으셨다. 우리나라에 그런 분이 계셨다는 것은 행운이며 행복이었다.”
―최근 세상을 떠난 신상우 국회부의장과도 가까웠다.
“그 양반은 내가 건달생활을 하던 1971년 지인의 소개로 만났다. 그때 막 야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는데 국회 본회의 질의할 내용을 나에게 부탁했다. 당시 경기도 광주에 서 폭동이 일어났다. 양택식 서울시장이 용산역 근처 빈민가를 깡패를 동원해 강제철거한 다음 그 사람들을 광주와 성남에 갖다버리다시피 했다. 그때 내가 이 문제를 정리해서 준비해줬는데 국회 데뷔전이라고 할 수 있는 본회의 질의에서 오직 이 문제 하나만을 제기했다. 지금 생각하면 논리는 이랬다. ‘우리의 판자촌은 서구의 슬럼과 다르다. 슬럼은 도시 패배자들의 집단이지만 우리의 판자촌은 시골에서 저곡가 정책으로 내몰려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올라왔지만 도덕적으로 건강하고 일할 의욕에 불타고 있다. 그런데 정부가 잘못해 이들을 행정살인한 것이다’. 그때부터 최근까지 인연을 이어온 거다. 내가 집안 걱정 안 하고 70년대와 80년대 내내 민주화운동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넉넉한 생활비를 몰래 지원해준 덕분이다. 그 돈으로 많은 수배자를 도울 수 있었다. 지금의 내가 그나마 ‘민주화의 대부’니 ‘민주화의 비밀병기’니 하는 과찬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신 부의장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대로 가면 새누리당은 침몰한다.”
―김영삼이나 신상우와의 인연 때문인지 지금의 새누리당에도 비판적 애정이 있다. 권영세 사무총장은 어디선가 자신의 멘토를 김정남이라 했던데.
“그보다는 민주화가 된 마당에 더 이상 민주 반민주로 나눠서 사고할 필요는 없다. 어느 당이 나라의 가야 할 길을 제대로 고민하고 있는지를 지켜볼 뿐이다. 최근 새누리당으로 이름을 바꾼 한나라당 사정은 한 마디로 처참한 수준이다. 이것은 그들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도 불행하다. 지금대로 가면 새누리당은 참패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 만큼 붕괴할 것이다. 그러면 방향도 없이 들썩거리는 민주통합당 세상이 될 테고 새누리당의 역량으로는 제대로 된 견제자 역할을 할 수 없다. 나라 꼴이 어떻게 되겠는가?”
―오랫동안 한국정치를 걱정하며 지켜본 안목으로 볼 때 새누리당은 이대로 침몰할 것으로 보나?
“지금처럼 박근혜만 쳐다보고 있으면 그렇게 되지 않겠는가? 박근혜는 되어서도 안 되고 될 수도 없다고 본다. 되어서 안 되는 이유는 시대의 큰 흐름에 역행하는 인물이다. 중동에서도 민주화가 이뤄질 정도로 자유와 민주를 향한 물결은 세계사의 대세다. 박근혜는 아버지의 유산 이외에 아무것도 보여준 것이 없다. 또 얼마나 폐쇄적이고 권위주의적인가? 이런 상태로 대선에 갈 경우 그것은 다시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를 되살릴 것이고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것이다.”
―될 수 없다고 보는 이유는 뭔가?
“그전까지는 신비감이라도 있었는데 비대위와 공심위 인선을 통해 그가 사람 보는 능력이 드러났다. 좋은 기회를 놓쳤다. 베스트 코리아를 만들 수 있는 각 분야의 최고 인재들을 찾아내고 또 공정한 인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어야 했다. 그런데 누가 봐도 실패작이다. 치마폭 사람들만 골랐다. 이제라도 그 당 의원들은 제대로 고민하고 몸부림쳐서 한국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인물이 누구인지를 두고서 치열한 논쟁을 벌여야 한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러면 문재인도 별로고 박근혜도 별로라는 건데. 우리 국민은 어떤 인물을 다음 지도자로 뽑아야 한다고 생각하나.
“지금 우리나라가 당면한 핵심과제들을 자신의 머리로 고민하고 자기 언어로 풀어내어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질 수 있는 헌신성이 있어야 한다. --> 이거 중요한 말이다. 고래로, 정치가들은 자신의 머리와 자신의 언어가 없어왔다. 이것은 투사와 정치가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것 같다. 자신이 그 일로 불이익을 볼 줄 알면서도 하는 사람은 투사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 자기가 개인적 이익을 볼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사람은 정치가다. 지금 야당에 투사가 있는가? 적어도 지도부 중에는 없는 것 같다. 이 나라가 고민이다. 국민을 통합할 수 있는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 박근혜는 세종시 문제에서 보듯 국가백년대계보다는 개인의 신의를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은 그 뜻이다. 잘 보라. 언제부터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시작되었는지. 결국 세종시 문제에서 정운찬 총리를 앞세우고 자신은 비겁하게 뒤로 물러섰다. 그때 당당한 결단을 했다면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점에서는 오히려 정 총리에게 점수를 줄 필요가 있다.”
―그래도 직접 정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유혹도 있었을 테고.
“어릴 때는 정치인에 대한 꿈이 있었다. 그러나 암흑 속을 30년간 숨어 살다 보니 어느새 50이 돼 있었다. 정치는 나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경세가(經世家)로 불러준다면 만족한다.”
‘민주화운동의 대부’ 김정남은 인터뷰를 마치며 꼭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내가 굳이 진보라고 한다면 진보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 후.. 가슴에 와 닿기는 하지만, 이런 마인드로는 정권을 잡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사랑받는 것 보다는 다른 것들이거든요... 사실은 사랑받는 게 중요한 건데, 그걸 왜 잃고서야 깨닫게 될까? 본질은 사랑이었는데 말이다.. 직정적으로 널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진정으로 깊이 있게 사랑하는 것은 어렵다. 노무현도 직정적으로 사랑한다 수준에서 조금씩 진정 사랑한다는 것이 뭔가를 깨달아갈 때쯤 떠나버린 것 아닐까?” 공자의 제자 번지가 공자에게 인(仁)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공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人)”이라고 했다. 자료를 보니 김정남이 존경하는 인물 3인은 김구와 넬슨 만델라 그리고 공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