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토 유키에 (곱창전골)

2011. 4. 24. 09:37People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20114/111240147/1

 

日명반 해설서 낸 ‘곱창전골’ 리더… “한일 더 친해졌으면”

“3년간 고생하며 책을 쓰고 나니 이제야 한국어를 조금 알게 된 것 같습니다. 하하하.” 11일 일본 음악가 사토 유키에 씨(58)가 사는 서울 마포구 자택 응접실에는 LP레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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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도 인터뷰인데 출처를 모르겠네 ... ;;;; 

 

"신중현·산울림이 내 마음을 폭발시켰다"

한국 인디음악계에서 '곱창전골'은 세 가지 뜻이다. 첫째, 록밴드 이름, 둘째, 홍대 앞에 있는 음악바의 이름, 셋째가 음식 이름이다.   <-- 세번째는 맞지 않는듯... 인디음악계라는 걸 쓸 필요도 없는 거잖아...   '한국에서... ' 가 맞다. 그리고 순서는 음식 이름이 제일 처음에 나와야 한다. 굳이 '한국 인디음악계에서...' 라고 쓰고 싶다면 두 가지로 해야 한다.  

사토 유키에(佐藤行衛·48)는 그 첫째 의미인 밴드 '곱창전골'의 리더인 일본인 뮤지션이다. 그는 스스로를 "한국 인디음악의 탄생부터 지금까지를 지켜본 '홍대 워처(watcher·연구자)'"라고 칭한다. 사토는 지난 2005년 공연비자가 없다는 이유로 강제 출국당한 뒤 한국 여성과 결혼해 돌아올 만큼 한국과 한국 대중음악을 사랑하는 사나이다. 그는 작년 말 '제3회 홍대 앞 문화예술상' 공로상을 받았다. 한국의 즉흥 음악을 발굴하고 소개한 공을 인정받은 것이다.


사토의 공연을 처음 본 건 7년 전쯤이었다. 그는 당시 실험음악 창작에 몰두하고 있었다. '불가사리'란 이름의 공연에서 그는 기타를 치다가 플라스틱 오리인형들을 눌러댔다. 각각 크기가 다른 3개의 인형은 "빽빽" "빡빡" "뻑뻑" 소리를 냈다.

음악의 모든 전통과 관습을 부정하고 그 전위(前衛)에 선 이 일본인은 한국 아방가르드 공연의 최전방을 지켜왔다. 그는 2003년부터 지금까지 매월 '불가사리'란 이름으로 전위음악 공연을 해오고 있다. 한국 인디 뮤지션들을 일본에 소개해 온 그는 지난달에도 한국 인디밴드 '타묘(Tamyo)'를 데리고 도쿄에 갔다가 지진을 겪기도 했다. 이 괴짜 뮤지션을 지난 19일 홍대 앞 한 카페에서 만났다. 1999년 서울에 정착한 그는 한국말을 매우 잘했다.

―도쿄도 지진 영향이 컸다던데요.

"그때 마침 샤워하고 있었는데 지진이 났어요. 아까운 술병들이 많이 깨졌죠. 그래서 지진 멈춘 다음에 남은 술을 다 마셔버렸어요. '보관해봤자 지진 나면 의미가 없다' 이러면서요."

―오래전부터 한국 음악을 일본에 소개해왔죠.

"황신혜밴드, 어어부밴드, 시나위…. 많이 데려가서 공연했죠. 놀러 가는 셈치고 가서 일본 뮤지션과 관객과 교류하는 거죠. 음악 하는 사람들은 외국 가면 공연하고 싶어하거든요."

―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계속 한국 음악을 일본에 소개하는 이유가 뭡니까.

"좋아하니까요. 우리는 비즈니스 못해요. 그래서 일본 갈 때도 다 자기 돈으로 가죠."

―한국에 처음 온 게 1995년 3월이죠.

"그땐 한국이 어디 있는 나라인지도 몰랐죠.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가장 싼 해외여행'이라고 해서 한국에 오게 됐어요. 야키니쿠(불고기)를 좋아해서 내 별명이 '야키니쿠 박사'였어요. 친구들이 '진짜 야키니쿠는 한국에 있다'고 했죠. 그런데 제가 워낙 청개구리여서 불고기 말고 다른 음식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중 가장 희한했던 게 인스턴트 라면을 넣어서 먹는 찌개(부대찌개)였어요. 스프는 다 버리고 말이죠. 저건 도대체 무슨 요리인가 했었죠."

―그럼 왜 밴드 이름을 곱창전골로 했습니까.

"한국 여행 가이드북에 있는 음식 중 하나가 곱창전골이었어요. 갈비나 비빔밥은 일본의 한국 식당에도 있었지만 곱창전골은 처음 보는 메뉴였어요. 제가 곱창을 좋아해서 밴드 이름으로 한 거죠."

―한국 음악은 어떻게 접했습니까.

"제가 어려서부터 밴드를 했지만 한국 음악은 아는 게 전혀 없었어요. 그때 가이드북에 소개된 음반이 신중현과 산울림 같은 밴드의 것이었어요. 한국 음반을 15장쯤 사 갖고 일본에 가서 듣자마자 '이게 도대체 뭐야? 이건 연구해봐야 하는 음악이다' 했던 거죠."

―그게 어떤 음악이었나요.

"'신중현과 엽전들' 1집이었어요. 첫 곡 '미인'을 들었을 때의 그 충격은, 비틀스를 처음 들었을 때와 비슷했어요. 1960~70년대 일본 록음악과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다른 음악이었죠."
<-- 비틀즈와 비교된 '미인'...  나도 다시 들어보고 싶다. 뭐, SKT 광고에 쓰이고 있긴 하지만..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잠재력이 만만치 않음을 느낀다. 돈에 의해 움직이니까 아이돌 그룹들이 난무하고 있긴 하지만,


사토는 이후 일본 뮤지션들에게 한국 음악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처음 반응을 보인 사람은 현재 김창완밴드에서 기타를 치고 있는 하세가와 요헤이(長谷川陽平·40)다. 하세가와는 사토와 함께 곱창전골을 만들었다. 사토는 "하세가와가 한국 음악을 듣더니 깜짝 놀라며 '장난 아니다(とんでもない)'라고 했다"고 말했다. 사토는 95년 8월 한국을 다시 찾을 때 하세가와와 동행했다. 그때쯤 일본인 4명으로 이뤄진 밴드 '곱창전골'이 결성됐다. 첫 앨범 '안녕하시므니까?'를 낸 건 99년이었다. 이 음반은 현재 절판돼 인터넷에서 2만원 넘게 거래되고 있다.

―처음 한국 왔을 때 홍대 앞 인디문화를 알고 있었습니까.

"아니요. 그때는 홍대를 몰랐어요. 당시 일본 PC통신에 '한국'으로 검색을 했는데 결과가 60건밖에 없었어요. 지금은 뭐, 몇억 건이 넘겠지만. 홍대 앞은 95년 말쯤 오게 됐어요. 한국 인디음악이 막 시작될 때였죠."

―홍대 앞 음악바 '곱창전골'과는 관련이 있습니까.

"사실 아무 관련이 없죠. 그렇지만 그 바가 워낙 옛날 한국 음악 LP를 많이 갖고 있어서 우리가 단골이었어요. 바 주인하고도 잘 아는 사이이고요."

―밴드 '곱창전골'은 99년 1집만 내고 더 이상 활동이 없잖습니까.

"올해 2집이 나옵니다. 이미 녹음을 다 끝낸 상태예요." 곱창전골 1집에는 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과 '미인', 산울림의 '그대는 이미 나' 등 한국 노래들과 사토의 한국어 신곡 '하나 둘 셋', '정보 정키' 등이 실려 있다.

―한국에 처음 온 게 95년인데 어떻게 4년 만에 한국어로 된 음반을 낼 수 있었습니까.

"처음엔 한국밴드의 노래를 연주하는 밴드로 활동하려 했는데 음반사에서 자작곡도 넣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일본에서 만들었던 노래 가사를 한국어로 번역해서 녹음했죠. 그때 프로듀서를 맡은 신대철('시나위' 리더)씨가 가사 번역을 도와줬어요."

―그 음반에 우여곡절이 많았다면서요.

"그때는 문화관광부에 음반을 등록해야 하던 때였어요. 원래 '사토 유키에와 곱창전골'이었죠. 음반을 완성해서 가져갔더니 '밴드 이름에 일본인이 있으면 안 된다' 해서 지우고 다시 갔더니 '음반 표지에 일본인이 나오면 안 된다'해서 또 지우고 다시 갔죠. 그러니까 '작사·작곡가에 일본인이 있으면 안 된다' 해서 '작사·작곡 곱창전골'로 하면 되느냐고 하니까 안 된다고 해요. 어쩔 수 없이 당시 매니저를 작사·작곡가로 둔갑시켜서 음반을 냈죠. 그 모든 걸 한 번에 안 가르쳐주고 갈 때마다 안 된다고 하니까 계획보다 훨씬 발매가 늦어졌어요."
<-- 내가 이래서 공무원 새끼들을 싫어한다. 물론, 훌륭한 분들도 있겠지만... 어찌보면, 조직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다. 그 조직에서 무난하게 살아남으려면 저렇게 바뀐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공무원들을 바꿀 수 있는 조직 전략도 있지 않을까? 나는 있다고 본다.


―'불가사리'란 공연 이름은 어떻게 붙었습니까.

"원래 제목이 '불가사의한 음악회'였는데, '불가사의'와 '불가사리'가 비슷해서 그렇게 바뀐 거죠. '불가사리'는 한국 고전 속에 나오는 괴물이니까 일본의 '고지라'와 같은 거잖아요. 재미있기도 하고."

'불가사리' 공연은 지금도 매월 마지막 주 일요일 오후 4시에 홍대 인근 갤러리 겸 클럽 '요기가'에서 열린다. 이달엔 23일 오후 4시다. 사토는 "정기공연은 매월 1회이지만 실험음악을 하는 외국 친구들이 오면 그때마다 '스페셜 공연'을 하기 때문에 연 20회 정도 한다"고 말했다.

―그 '불가사리' 때문에 추방됐던 거죠.

"2005년에 '공연비자 없이 입장료를 받고 라이브를 했다'는 이유로 벌금 300만원 내고 강제 출국당했어요. 법을 어긴 건 사실이지만, 아무도 그런 법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무척 당황했었죠."

당시 '불가사리' 공연의 입장료는 1만원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대관료 명목이었고 사토를 비롯한 뮤지션들은 개런티를 전혀 받지 않았다. 그러나 당국은 '관광비자로 입국한 외국인이 입장료가 있는 공연 무대에 섰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출국을 명령했다. 당시 신중현과 김창완을 비롯한 뮤지션과 수많은 사람이 탄원서에 서명했으나 사토는 도쿄행 비행기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토는 출국 8개월 만인 2006년 초 홍대 앞으로 돌아왔다. 그와 오랫동안 사귀어온 패션디자이너 한운희(39)씨와 결혼해 '동거비자'를 받은 것이다. 한씨는 예전 한 방송 인터뷰에서 "한국 문화를 위해 좋은 일만 해온 사람이 쫓겨나는 사실이 너무 분해서 결혼을 결심했다"고 말했었다. 두 사람은 지금 홍대 인근 다세대주택 2층에 살고 있다.

―한국에 오기 위해서 결혼한 것입니까.

"제가 강제 출국당할 때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이 '사토씨, 여자친구 있습니까' 하고 물었어요. '있다'고 하니까 '빨리 결혼하세요. 결혼하면 아무 문제없어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농담으로 '비자 때문에 결혼했다'고 말하곤 하지요."

―온갖 소음과 몸짓까지 표현하는 실험음악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음악이 좋으니까요. 그것밖에 아는 게 없으니까요."

―악보로 그릴 수 없는 것도 음악입니까.

"저는 원래 악보를 보지도 그리지도 못해요. 그러니까 보통 음악이나 실험음악이나 똑같아요."

―아이돌이 대세인 한국 음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일본도 마찬가지예요. J―팝과 K―팝은 이름도 비슷하고."

―그래도 일본엔 '비즈'나 '엑스재팬'같은 관록의 밴드들이 있잖습니까.

"그런 밴드가 하는 건 음악이 아니에요. 비즈, 엑스재팬, 라캉시엘… 그건 음악이라고 할 수 없어요. 그들보다는 한국의 '신바람 이박사(테크노뽕짝 가수)'가 더 음악성이 높아요."
<-- 음, 독특한 시각이지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멤버 교체 없이 활동을 해온 밴드들인데요.

"돈 때문에 하는 거죠. 저의 음악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예요."

―한국 인디음악의 무엇이 그렇게 좋아서 한국에 살고 있습니까.

"홍대에는 일본말로 '야리가이(やりがい)'가 있어요. 하면 할수록 더 하고 싶은 마음이라고나 할까. 아직도 열기가 많아요. 피버(fever) 있잖아요. 일본 인디음악은 70년대 말에 생겨나서 이제 그런 게 없어요."

2005년 말 나온 책 '홍대 앞으로 와'에 필자로 참여한 사토는 "한류 붐에도 불구하고 일본 친구들은 한국에 어떤 음악 세계가 있는지 잘 몰랐다. 나는 세계 여러 친구들과 함께 한국 록음악을 나누고 싶었다"고 썼다.

인터뷰 말미에 사토는 "내가 한국에 정착한 것은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했다. 그의 인생이 독특한 루트를 걸어온 동기 역시 그가 책에 쓴 글귀 중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원래 인디밴드의 시작은 '하고 싶다'는 마음의 폭발 때문"이라고 했다. 누구나 '하고 싶다'는 마음은 지니고 있다. 다만 사토 유키에처럼 폭발시키지 못할 뿐이다. 마음을 장렬하게 폭발시킨 그는 '한국 인디문화의 대부' 중 한 사람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