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시스와 노모스

2015. 7. 25. 03:17철학

San Sebastian 바닷가 Eduardo Chillida의 작품

 

피시스 그리고 노모스 

phýsis

nómos;

 

 

기원전 4~5세기 경의 그리스에서 '최초의 철학자'가 '자연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로서 등장하였을 때, Physis는 '사물의 본질' 혹은 '만물의 생성/소멸의 근원으로서의 우선 존재'를 의미하였다. 영어로는 그냥 Nature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데모크리토스는 피시스적인 것으로 원자, 공허가 있고, 노모스적인 것으로 단 것, 신 것, 따뜻한 것 등이 있다고 했다. 어째, 본질과 현상같다. 

 

소피스트의 전통에서, 피시스는 특히, 노모스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쓰여졌다. 주로 인간 존재의 어떤 부분이 '자연적인' 부분이고 어떤 부분이 '관습적인' 부분인지에 대한 논쟁에 등장한다. 당연히 '자연적인' 부분이라고 인정이 되면 누구도 거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터였다. 원래 그렇게 생겨 먹었다는데... 

 

반면, '관습적인' 부분이라면, 그것은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절대와 상대의 논쟁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자연적인 부분이라고 해도, 노력에 의해서 바뀌어야 한다든지 하는 그런 논의는 당연히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성선설, 성악설 등을 상기해 보면, '자연'이라는 말의 위력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소피스트는 피시스와 노모스를 구별하였다. 

그러나 칼리클레스와 같은 사람은 피시스를 이기적 관점에서 이해하여, 인간의 본성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노모스 보다는 피시스를 따르는 것이 옳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기도 했다. (본능에 충실한 짐승과 같은 삶?) 이는, 프로타고라스가 피시스 이후에 노모스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필요에 의해서 생겨났다고 (온건하게) 구분한 이후에 따라온, 극단적으로 멀리 나간 주장이었다. 


최초의 소피스트로도 알려진 프로타고라스의 사상과 접근법은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프로타고라스'로 유추해 볼 수 있다. 

 

대화의 주제는 '덕 arete' 인데, 크게 1. 덕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가?  2. 덕은 하나인가 아니면 여러가지인가? 의 두가지 화두를 중심으로 진행이 된다. 이미 대화의 주제가 피시스가 아니라 노모스로 내려와 있다. 프로타고라스는 노모스의 상대성에 관심을 가졌고, 소크라테스는 그 상대성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추구했다. 

프로타고라스는 어떤 주장을 펼쳤을까? 2번에 대해서는 당연히 '덕은 여러가지이다' 였을 거고, 1번에 대해서는?

'덕은 가르치고 배울 수 있다' 였을 것이다. 그의 직업을 생각해 보라. 

실제로도 책은 그렇게 진행이 된다. 그런데, 가만... 상대주의적인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 덕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지? 덕이란 건 명확히 실체를 잡을 수 없는 것 아닌가? 뭔가 명확하게 규정할 수 있는 실체가 있어야 가르칠 수 있고, 배울 수 있지. ... 그래서 마지막에 보면 오히려 소크라테스는 덕을 가르칠 수 있다고 하고, 프로타고라스는 가르칠 수 없다고 하여 처음의 입장이 바뀌면서 뒤죽박죽이 되버린다. 결론을 내지 못한 것 같지만, 결국은 덕에 대한 표면적 이해가 더 깊어지면서, 덕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라는 절대주의적 의견이 득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건 내가 책을 읽지 않아서, 그냥 추측) 

 

오늘날 잘 알려진 프로타고라스의 철학을 한마디로 이야기 하면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대화편 중, '테아이테토스'에 나온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존재하는 것의,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의.  Man is the measure of all things: of the things that are, that they are, of the things that are not, that they are not." 상당히 깊은 이야기다. 존재와 부재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본질과 현상 (혹은 허상)에 대한 이야기일수도 있다. 이것을 상대주의의 대표적인 표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지만, 여기서 더 논의를 진행해 보면, -뒤의 문장 때문에- 절대주의적인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응? 

 

왜 굳이 존재와 부재를 구분했을까?  부재를 인정하고 구분하면, 그것이 역설적으로 실체를 가지게 되고, '인간'이란 전제조건만 살짝 비틀어주면 인식 저너머의 세계에 대한 지평이 열린다. 

 

실제로, 플라톤은 '소피스테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있지 않은 것들은 적어도 어떻게든 있어야 한다."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순수한 존재와 순수한 무는 동일한 것이다." 매우 동양스러운 이야기이다. 하이데거는 부재 (무) 가 존재의 본질이라고 했으며, 사르트르는 '인간의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고 했다. 대략적으로, 노모스가 피시스보다 더 앞선다는 선언으로 볼 수 있다. 논리적이지는 않지만, Impact는 있는 주장이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논리적일 수도 있다.  상당히 멀리 옆길로 새어버린 이야기인데.. 그러므로 이만 Stop. 

 

한편, 프로타고라스의 저서 '신에 관하여'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고 한다. 

 

"나는 신이 존재한다, 안 한다 말할 수 없다. 어떤 모습인지도 말할 수 없다. 그 앎을 가로막는 요인들이 너무 많은데, 그중에느 논의 대상이 불분명하고 인간의 삶이 너무 짧다는 사실도 포함된다." 

 

프로타고라스는 이 책 때문에 신성모독으로 기소되고, 바다를 건너 시칠리아로 도망가다가 익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정확한 사실은 아니고 전승이다.) 

그리고 사족으로, 플라톤에 의한 프로타고라스의 평가는 그리 인색하지 않다. 소피스트들을 비난했지만, 프로타고라스는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존경할만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내가 볼때는 절대주의의 악습에 빠지지 않은 균형감각을 지닌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플라톤은 말한다. 

 

"소피스트는 진리가 아니라 모든 사물에 대한 그럴듯한 인식만을 가진다." 

 

상대주의의 본질적 한계를 이야기한 것이다. 물론, 진리가 뭔데? 그걸 어떻게 증명할 건데?에 대한 확실한 답은 없지만, 그게 진리는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부터 이 문단은 흘려 읽어라. 왠지 프로타고라스의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존재하는 것의,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의'라는 말과 연결이 되는 것 같다. 인간이 진리를 인식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게 객관적으로 부재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아뭏든, However, 다시 정리하면, 피시스는 프로타고라스와 소크라테스에 의해 노모스가 도입되면서 대립적인 개념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프로타고라스에게 노모스는 피시스에 대립되는, 그 자체로 상대적 성격을 띠는 개념이었고, 소크라테스 (혹은 플라톤)에게는 보편성을 부여할 수 있는 개념이었다.  

 


 

Nomos는 '명문화된 법' 혹은 '불문의 관습'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스인들이 좋아하는 Agon (갈등/대결/경연) 사상에 의하면 세상은 피시스와 노모스의 agon이기도 하다. 아폴로가 노모스를 대표하는 신이라면, 뱀, 용, 바다괴물 같은 것들은 피시스를 대표하는 것들이다. 피시스에는 뭔가 길들지 않은 원시적인, 불가해한 (공포의) 느낌이 있다. 그리스인들에 따르면 여성은 피시스이고 남성은 노모스이다. 

동양의 음양 사상하고 닮은 점도 꽤 있다. 프로타고라스에 이르러서 노모스가 인위적인 규칙과 법을 의미한다고 좁게 규정되기 전의 피시스-노모스는 확실히 비슷하다. 

 

자연은 Chaos상태가 본질이며, 거기에 어떤 계기가 있어야만 cosmos 상태가 가능하다고 본다. 물론 단순하게 보면, chaos는 피시스이고 cosmos는 노모스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으로 끝일까? 나는 Cosmos인 피시스가 있고, Chaos인 노모스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나의 영화에 대해 사람들이 '자연 친화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핀트에 어긋납니다."  - 미야자키 하야오

 
"문제는 인간 행위의 선악 너머에 있습니다. 말하자면 생명이 있는 존재의 차원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과연 살아갈 만한 힘이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문제는 생명력에 있다는 말이지요. 오늘날의 일본 아이들에게는 이런 생명력이 약합니다. 이것이 정말 걱정됩니다."  - 미야자키 하야오

[네이버 지식백과] 피지스의 자연 (애니메이션으로 보는 일본-소녀와 마녀 사이, 2005. 7. 15., ㈜살림출판사)

휴... 원래는 칸트의 이성비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 영국의 경험론, 특히 흄의 회의주의를 살펴보고, 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피시스와 노모스를 간단하게 보려고 했던 건데... 엄청 길어져 버렸다. 
 
Cosmos의 피시스냐, Chaos의 피시스냐까지 나가버리다니...
 
아뭏든, 서양 철학의 근간이 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므로, 이 정도의 정성은 기울여 살펴 볼만한 주제가 아니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