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성 이야기
2011. 2. 3. 03:33ㆍ전략 & 컨설팅/전략
참, 악조건을 이것 저것 갖추고도 고비고비 요소요소마다 최고의 성과를 달성해낸 남자.
이걸 행운이라 해야 할지, 노력이라 해야 할지.
대학교 들어가서 키가 6cm나 더 크다니... 그것만은 행운이 맞겠지?
김연아 스토리와 비슷한 점들도 보인다. 재능은 있었지만 기존의 시스템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해외에서 돌파구를 찾았다는 것.
의욕과 의지의 중요성이 간과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최근에 박지성 은퇴와 관련해서 트위터 글을 올렸던 차범근 감독님. 아들 내미와 친구라는 점도 있겠지만, 차범근 축구교실에서 주는 축구상을 수상했을 때 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거다.
차 감독님과 그리 사이가 좋지 않은 허정무 감독님도 얽혀 있으니 참 재미있다.
재능이 재능을 알아보고 키우는 사회. 박지성은 그냥 단순한 축구선수가 이미 아닌 것 같다.
[스포탈코리아] 옛 말에 인생에는 모두 세 번의 기회가 찾아 온다고 한다. 성공과 실패는 그 기회를 잡느냐 마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종의 운명론에 귀를 기울이기엔 성공과 실패의 경계 자체가 모호한 게 인생 아니던가. 더군다나 기회는, 지붕 위에 전등이 달린 택시처럼 ‘이제 잡으면 돼’라고 신호를 보내지 않는 법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저 늘 준비하고 또 준비할 뿐이다. 그게 '스포탈코리아'가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아 성공의 발판을 만든 박지성에게서 배운 교훈이다.
글 허정윤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박지성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차범근 축구상을 받은 뒤 수원의 축구 명문 수성중학교에서 입단 제의가 들어왔지만, 부모님은 안용중학교로 진학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고민하던 박지성은 부모님의 뜻에 따라 안용중학교로 진학했다. 이때 등번호 13번을 달고 뛰기 시작한 박지성은 초등학교 시절과 마찬가지로 ‘덩치는 작았지만 순발력이 뛰어난’ 자신의 장점을 십분 발휘했다. 공격형 미드필더에 처진 공격수 역할까지 소화하며 팀을 이끈 박지성은 약팀으로 분류되던 안용중학교를 도내 정상권 팀으로 변모시켰다.
성공적인 중학 시절을 마친 뒤, 박지성은 수원공고에 진학했다. 축구 명문이 아닌 수원공고를 택한 건 막 프로 선수 생활을 마치고 지도자로 나선 이학종 감독 때문이었다. 국가대표팀을 거쳐 J리그 생활도 경험한 선수가 은퇴하자마자 고등학교 감독으로 부임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이 선택은 박지성의 축구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주관이 뚜렷했습니다. 오직 축구공만 가지고 놀았어요. 축구선수로 성공하겠다는 각오가 대단했죠” - 수원공고 이학종 감독
박지성이 수원공고를 택한 것 못지 않게 이학종 감독이 박지성을 택한 것도 의외였다. 고등학생치고는 왜소한 체격이 기존 지도자들의 눈에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학종 감독은 “잘만 키우면 물건이 될 선수”라며 박지성의 잠재력에 믿음을 보였다.
이 감독은 박지성의 가슴에 담긴 축구선수로 성공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간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위의 탐탁치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박지성을 영입해 그의 단점을 극복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덕분에 박지성은 수원공고 진학 이후 1년 가까이 기술훈련을 배제한 채 체력과 작은 체격을 보완하는 훈련에 중점적으로 매달렸다. 동시에 학원축구에서 소홀히 여기기 쉬운 기본기를 닦는 훈련에도 매진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정평이 나 있던 박지성의 ‘융통성 없는’ 성실함은 그의 단점을 쇄신하겠다는 이 감독의 목표를 생각보다 빠르게 달성시켜주었다. 단순하면서도 지루한 기본기 훈련을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던 박지성의 성실함은 이후 그가 유럽 무대에 진출한 뒤에도 성공적으로 적응하고, 팀에 안착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왜소한 체격은 여전히 그의 약점으로 지목됐다. 보다 못한 박지성의 아버지는 아들의 몸집을 불리기 위해 방방곡곡 돌아다니며 개구리를 잡아 즙을 내 먹였다. 박지성이 훗날 영국 언론을 통해 ‘개구리 소년’으로 불린 이유다. 아버지 박성종씨는 “군말 없이 개구리를 잘 먹어 준 지성이가 고맙다”고 회상했다. 더 좋은 음식으로 몸 보신을 시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의미였지만 이러한 부모의 정성이 박지성에게 큰 힘이 되었다는 것은 불문가지일 것이다. 이처럼 ‘개구리 포획 작전’에 나선 가족들의 노력 덕일까. 박지성의 체격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입학할 무렵, 158cm에 불과했던 키가 2학년이 되자 170cm를 넘어선 것이다.
“이학종 감독님과 함께 훈련하면서 축구가 몸이 아닌 머리로 하는 종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박지성
1년 간의 체력 훈련과 향상된 체격 조건 덕에 2학년부터는 자연스럽게 기술훈련에 힘을 쏟게 됐다. 현역에서 은퇴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학종 감독은 선수들과 직접 몸을 부딪히며 연습 경기에 나섰다. 박지성은 이 과정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고 덕분에 상대의 움직임을 정확히 예측하고 수비수를 피해 절묘한 패스를 찔러 넣어주는 등 보다 다양한 플레이에 능숙한 선수로 성장했다. 6개월 만에 박지성이 주전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를 꿰찬 것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이 항상 잘 풀린 것은 아니었다. 1998년 겨울,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박지성에게는 그 어느 때 보다 짙은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K-리그 진출을 원했던 박지성에게 어떤 프로 구단도 손짓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수원의 2군 팀에 들어가기 위해 테스트를 받았지만 통과하지 못했고, 서울과 지방의 대학 팀에서는 그의 왜소한 체격을 이유로 영입 거부 의사를 전해왔다. 그렇게 낙담하고 있을때, 희소식이 들려왔다. 신입생 10명을 뽑을 예정이던 명지대에서 이학종 감독에게 선수 자리 하나가 비었다는 연락을 전한 것이다. 소식을 들은 이 감독은 명지대를 이끌던 김희태 감독에게 박지성을 강력 추천하고 나섰다, “두고 보면 알겠지만 크게 될 선수입니다. 2년 뒤에는 제가 고마우실 지도 모릅니다”라는 것이 이학종 감독의 추천사였다. 김희태 감독은 이를 받아들였고 천신만고 끝에 박지성은 명지대 축구부의 신입생 10명 중 마지막 멤버로 팀에 합류한다.
어렵사리 대학 축구 선수가 되었지만 박지성의 절망감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어느 팀도 자신을 원하지 않았다는 현실이 참담했고 한동안 ‘내가 그렇게 못난 놈인가’라는 실망감에 자책도 했다. 하지만 열패감을 되뇌이기에 그는 아직 젊었고 이내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났다. 절치부심하며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입증하겠다는 오기를 품은 박지성은 겨울 내내 뜨거운 담금질로 훈련을 거듭했다.
“올림픽 대표팀에 선발되면서부터 내 인생의 모든 행운이 시작됐다” - 박지성
명지대 축구부에 합류하자마자 울산에서 3개월간 합숙훈련을 거친 박지성은 김희태 감독으로부터 높은 점수를 받았다. 김 감독은 지구력은 물론이고 탄탄한 기초 체력을 갖춘 박지성에게서 애초 생각보다 큰 가능성을 보게 된다. 그는 훗날 “지성이를 가르쳐 본 지도자는 모두 그를 좋아할 것”이라며 박지성을 높이 평가했다. 김 감독은 이어 18세의 박지성을 연습게임에서 계속 주전으로 출전시켰다. 고교 시절의 혹독하고 성실했던 훈련 덕에 단번에 주전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 때 마침 허정무 감독이 이끌던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이 전지훈련 차 울산으로 내려왔다. 울산에서 조우하게 된 명지대 축구부와 올림픽 대표팀은 연습경기를 가지게 됐는데 이미 김희태 감독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던 박지성은 올림픽 대표팀과의 연습경기에도 선발로 출전했다. 그리고 이 연습경기는 이후 박지성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 계기가 됐다. 박지성은 왼쪽 윙백으로 출전해 평소 선망의 눈길로 바라만 보던 박진섭, 김도균 같은 선수들을 상대했다. 이 경기에서 박지성은 자신이 여전히 ‘체력’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부족한 점만 잔뜩 찾아낸 본인과는 달리 허정무 감독은 박지성의 뛰어난 체력과 경기를 지능적으로 풀어갈 줄 아는 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1999년 이른 봄, 박지성은 생각지도 않던 올림픽 대표팀 소집연락을 받는다. 만 18세, 아직 청소년 대표로도 한번 뛰지 못했던 무명의 박지성은 그렇게 첫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게 된다.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며 승승장구하던 박지성에게 이듬해인 2000년 5월 또 다른 낭보가 찾아왔다. 박지성은 19세의 나이, 대학생의 신분으로는 처음으로 교토 퍼플상가에 입단해 J리그 진출을 이뤄냈다. 이미 그 때 박지성은 이천수, 최태욱과 함께 ‘한국 축구를 이끌 10대 기대주’로 손꼽히며 최연소 국가대표로 뽑혔고, 19세 이하 청소년 대표팀과 올림픽 대표팀, 그리고 국가 대표팀까지 모두 세 개의 대표팀에서 활약하며 국제경험을 차곡차곡 쌓아가던 참이었다. 이런 각 대표팀에서의 활약상이 반영된 덕분인지, 박지성은 당시로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교토와 1년 계약을 맺었다. 당시 교토는 시즌 시작 전에 이미 3명의 브라질 용병들을 영입했지만, 강등권인 16위로 전반기를 마친 상태였다. 그리고 팀을 위기에서 구해 줄 구세주로 박지성을 선택했다.
“박지성 군은 가능성이 충분한 선수다. 두뇌 회전이 빠르고 운동량도 많다. 그리고 미드필드 어느 곳에서든 뛸 수 있다. 교토에서도 잘 해 주리라고 믿는다.” - 기무라, 당시 교토 퍼플상가 강화부장
박지성의 J리그행은 그에게 또 다른 성장의 기회를 제공했다. 축구 선수로 한창 성장하는 시기에 다른 스타일의 축구를 경험하고, 배울 수 있었다는 점이 특히 그랬다. 결국 이 모든 변화들은 이전까지 했던 노력들이 박지성을 ‘준비된 선수’로 만든 그 때,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올림픽 대표팀과 만나게 되면서 ‘천재일우’가 된 것이다. 그러나 박지성에게 찾아온 성공이 모두 행운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의 말대로 공평하게 주어진 기회를 누군가는 잡고, 다른 누군가는 못 잡는 차이는 ‘준비 돼 있는지 여부’에 달려있는 것이다. 어쩌면 지독히도 융통성 없이 모든 것에 그저 성실함으로 임했던, ‘항상 준비하고’ 있었던 그였기에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가 성공으로 연결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앞두고 가진 허정무 감독의 인터뷰는 이러한 대목을 재차 증명해준다. 당시 허 감독은 “지난해 박지성의 선발을 두고 명지대 김희태 감독과 친하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냐는 눈총을 받기도 했는데 그의 능력과 발전가능성을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고 밝혔다. 올림픽 팀의 다른 주전 선수들보다 2살이나 어린 박지성을 허정무 감독이 얼마나 믿고, 아꼈는지 알 수 있다. 허정무 감독은 박지성을 2000년 4월 국가대표로도 선발하며 두터운 신임을 드러냈다. 김희태 감독도 허정무 감독의 그런 결정을 “지성이는 하루하루가 다른 선수”라는 말로 변호하고 나섰다. 허감독은 올림픽 팀에서 박지성을 수비형 미드필더와 왼쪽 윙백, 오른쪽 윙어 등 다양한 포지션에서 활용했다. 그렇게 수비부터 공격까지, 여러 포지션에서 뛰어 본 경험은 박지성에게 큰 자산이 되었다. 미드필더 전 지역에서 뛸 수 있는 박지성의 능력은 멀티자원을 선호하는 현대축구의 특성에 맞는 것이었고, 그래서 박지성은 어느 팀에 가서도 주전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을 수 있었다.
올림픽 대표팀에 선발된 이후 박지성은 체격적으로도 놀라운 성장을 보였다. 170cm, 60kg이던 체격조건이 키는 6cm나 더 컸고, 몸무게도 10kg 이상 늘어나게 된 것이다. 볼을 다루는 센스와 넓은 시야에 체격까지 갖추게 된 그는 올림픽 팀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주전자리를 굳히게 된다. 박지성은 와일드카드로 선발된 김상식과 짝을 이뤄 중원을 장악하는 임무를 맡았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에는 김상식 외에 홍명보, 김도훈이 와일드카드로 뽑혀 합류했으며 이동국과 설기현, 이영표, 고종수까지 모두 포진해 있었다. 본선진출 과정도 순조로웠고, 멤버들 중 상당수가 이미 국가 대표팀에서 뛴 경험도 가지고 있어 사상 최초의 8강 진입이라는 목표는 충분히 달성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올림픽팀은 출국 전 아프리카의 강호 나이지리아와 가진 두 차례의 평가전에서 모두 5-1의 스코어로 승리하기도 했다. 은완코 카누 같은 스타플레이어가 빠진 상태긴 했지만 나이지리아 팀에는 네덜란드와 스페인 등 명문클럽에서 활약하던 선수들이 많았기에 만만히 볼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당시 나이지리아 대표팀을 이끌던 조 본프레레 감독은 올림픽팀과의 경기 후 “한국이 우리보다 올림픽 8강에 진출할 가능성이 높다”며 한국의 역량을 추켜세우기도 했다. ‘리틀 허정무호’ 올림픽팀은 상승세의 순풍을 타고 스페인과의 본선 첫 경기를 치르기 위해 호주 애들레이드로 향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자, 현실은 달랐다. 본선 B조에 한국과 함께 배정된 스페인, 모로코, 칠레 중 한국은 가장 까다로운 상대인 스페인과 첫 경기를 치러야 했다. 당시만 해도 유럽축구에 약한 모습을 보여온 한국으로선 큰 부담일 수 밖에 없었다. 또 호주에 도착하자마자 수비의 대들보로 팀을 이끌 것으로 기대됐던 홍명보가 허벅지 부상으로 아예 팀에서 빠지게 된 점은 크나큰 악재였다. 대체요원으로 강철을 급히 수혈해오긴 했으나, 안정돼야 할 수비라인이 강적과의 첫 경기를 앞두고 오히려 더 흔들리게 된 점은 한국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었다. 올림픽 대표팀 부동의 오른쪽 윙백 박진섭도 스페인 전을 앞두고 부상으로 결장하게 돼 수비전열은 전체적으로 흐트러질 수 밖에 없었다.
팀의 리더들이 부상으로 전력 이탈하게 되면서 올림픽 팀은 더욱더 심리적으로 위축됐다. 사비, 푸욜, 잠브로타가 버티고 있던 ‘무적함대’ 스페인은 23세 이하 정예 선수들로 구성됐으면서도 이미 프리메라리가와 세리에 A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선수들이 즐비했다. 상대 선수들의 명성과 스페인이라는 이름에 잔뜩 긴장한 한국은 중원을 완전히 장악 당했고, 수비라인이 무너지며 세 골을 허용해 0-3의 완패를 당했다.
“지성이를 가르쳐 본 지도자는 모두 그를 좋아할 것이다. 지성이는 하루하루가 다른 선수다”- 김희태, 전 명지대학교 감독
박지성은 수비형 미드필더로 선발 출전했지만, 중원에서 완전히 밀린데다 헛발질로 이탈리아 세 번째 골의 빌미를 제공하는 등 부진한 모습만 보였다. 기량차이가 너무 컸고, 경험 부족이 뼈아팠다.
첫 단추부터 잘못 꿴 박지성과 한국은 절치부심의 각오로 더 열심히 훈련에 임했다. 2년간 준비해온 올림픽에서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잔여경기인 모로코전과 칠레전에서 승리할 경우, 한국의 8강 진출은 아직 가능했다. 모로코전을 앞두고는 가장 성격이 활발한 이천수 조차 묵묵히 훈련에 임했다.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컸다.
배수의 진을 치고 임한 모로코전에서 한국은 이천수의 골로 1-0 승리를 거두며 희망의 불씨를 살렸다. 박지성도 전 경기의 부진을 털고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 적절한 압박과 매끄러운 공수전환 능력을 보여주며 맹활약을 펼쳤다. B조의 복병 칠레가 스페인에 예상 외의 3-1 승리를 거두며 8강 진출국을 가리는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언론들은 복잡한 셈법을 동원하며 한국의 8강 진출 경우의 수를 따졌고, 4골 차 이상으로 남은 칠레전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칠레에는 와일드카드로 출전한 팀의 ‘정신적 지주’ 이반 사모라노가 있었다. B조 첫 경기로 치른 모로코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했던 사모라노는 한국의 경계 대상 1호였다. 허감독은 심재원에게 사모라노 봉쇄의 특명을 내렸다. 박지성에게는 이영표와 함께 중앙 미드필더로 나서 협력수비로 칠레 공격의 핵 다비드 피사로를 꽁꽁 묶으라는 주문이 떨어졌다.
칠레와의 경기 전반 11분만에 이천수가 퇴장을 당하며 한국은 경기를 어렵게 풀어나가게 됐다. 그러나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던 한국은 오히려 더 공격적으로 나섰고, 27분 이동국이 선제골을 득점하는 데 성공했다. 박지성은 협력수비로 피사로를 봉쇄하는데 매진하면서도, 상대 수비라인을 무너뜨리는 침투패스를 찔러주며 선제골 득점에 관여했다. 그러나 수적 열세에 처한 한국으로서는 득점에 더 성공하기는커녕, 칠레의 역습을 막는 것만도 힘겨웠다. 결국 이동국의 골은 결승골이 됐고, 한국은 1-0으로 승리했다. 같은 시각, 스페인은 모로코에 2-0 낙승을 거두며 8강 진출을 확정 지고, 한국은 2승 1패의 좋은 성적을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골 득실에서 밀려 8강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첫 경기였던 스페인전 패배가 두고두고 아쉬웠다.
박지성이 시드니 올림픽에서 보여 준 활약은 수치상으로 두드러지는 것은 아니었다. 첫 경기인 스페인전에선 팀 전체의 부진과 함께 제 실력을 보여주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로코전과 칠레전에서는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며 중원을 장악하는 데 최고의 수훈갑으로 활약했다. 상대의 공격이 끊어지고, 우리의 공격이 시작되는 곳에는 어김없이 박지성이 있었다. 이제는 영국 언론으로부터 ‘이름없는 영웅(unsung hero)’이라 불리곤하는 맨유에서의 박지성의 모습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은 박지성이 경험한 첫 국제대회였고, 19세로 아직 어렸던 그에게는 실패로 인한 절망감 보다는 좋은 교훈을 얻는 계기가 됐다. 박지성은 ‘무적함대’ 스페인과 직접 맞서 싸우며 유럽선수들의 기술과 힘 그리고 뛰어난 경기 조율능력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이기지 못할 상대’로 생각되지도 않았다. 박지성은 한국이 충분한 경험만 얻는다면, 스페인도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과 함께 희망을 가졌다. 그리고 2년 뒤인 2002년, 월드컵 4강에서 스페인을 만나 그 희망을 현실로 바꿨다.
이걸 행운이라 해야 할지, 노력이라 해야 할지.
대학교 들어가서 키가 6cm나 더 크다니... 그것만은 행운이 맞겠지?
김연아 스토리와 비슷한 점들도 보인다. 재능은 있었지만 기존의 시스템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해외에서 돌파구를 찾았다는 것.
의욕과 의지의 중요성이 간과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최근에 박지성 은퇴와 관련해서 트위터 글을 올렸던 차범근 감독님. 아들 내미와 친구라는 점도 있겠지만, 차범근 축구교실에서 주는 축구상을 수상했을 때 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거다.
차 감독님과 그리 사이가 좋지 않은 허정무 감독님도 얽혀 있으니 참 재미있다.
재능이 재능을 알아보고 키우는 사회. 박지성은 그냥 단순한 축구선수가 이미 아닌 것 같다.
[스포탈코리아] 옛 말에 인생에는 모두 세 번의 기회가 찾아 온다고 한다. 성공과 실패는 그 기회를 잡느냐 마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종의 운명론에 귀를 기울이기엔 성공과 실패의 경계 자체가 모호한 게 인생 아니던가. 더군다나 기회는, 지붕 위에 전등이 달린 택시처럼 ‘이제 잡으면 돼’라고 신호를 보내지 않는 법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저 늘 준비하고 또 준비할 뿐이다. 그게 '스포탈코리아'가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아 성공의 발판을 만든 박지성에게서 배운 교훈이다.
글 허정윤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박지성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차범근 축구상을 받은 뒤 수원의 축구 명문 수성중학교에서 입단 제의가 들어왔지만, 부모님은 안용중학교로 진학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고민하던 박지성은 부모님의 뜻에 따라 안용중학교로 진학했다. 이때 등번호 13번을 달고 뛰기 시작한 박지성은 초등학교 시절과 마찬가지로 ‘덩치는 작았지만 순발력이 뛰어난’ 자신의 장점을 십분 발휘했다. 공격형 미드필더에 처진 공격수 역할까지 소화하며 팀을 이끈 박지성은 약팀으로 분류되던 안용중학교를 도내 정상권 팀으로 변모시켰다.
성공적인 중학 시절을 마친 뒤, 박지성은 수원공고에 진학했다. 축구 명문이 아닌 수원공고를 택한 건 막 프로 선수 생활을 마치고 지도자로 나선 이학종 감독 때문이었다. 국가대표팀을 거쳐 J리그 생활도 경험한 선수가 은퇴하자마자 고등학교 감독으로 부임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이 선택은 박지성의 축구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주관이 뚜렷했습니다. 오직 축구공만 가지고 놀았어요. 축구선수로 성공하겠다는 각오가 대단했죠” - 수원공고 이학종 감독
박지성이 수원공고를 택한 것 못지 않게 이학종 감독이 박지성을 택한 것도 의외였다. 고등학생치고는 왜소한 체격이 기존 지도자들의 눈에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학종 감독은 “잘만 키우면 물건이 될 선수”라며 박지성의 잠재력에 믿음을 보였다.
이 감독은 박지성의 가슴에 담긴 축구선수로 성공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간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위의 탐탁치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박지성을 영입해 그의 단점을 극복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덕분에 박지성은 수원공고 진학 이후 1년 가까이 기술훈련을 배제한 채 체력과 작은 체격을 보완하는 훈련에 중점적으로 매달렸다. 동시에 학원축구에서 소홀히 여기기 쉬운 기본기를 닦는 훈련에도 매진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정평이 나 있던 박지성의 ‘융통성 없는’ 성실함은 그의 단점을 쇄신하겠다는 이 감독의 목표를 생각보다 빠르게 달성시켜주었다. 단순하면서도 지루한 기본기 훈련을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던 박지성의 성실함은 이후 그가 유럽 무대에 진출한 뒤에도 성공적으로 적응하고, 팀에 안착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왜소한 체격은 여전히 그의 약점으로 지목됐다. 보다 못한 박지성의 아버지는 아들의 몸집을 불리기 위해 방방곡곡 돌아다니며 개구리를 잡아 즙을 내 먹였다. 박지성이 훗날 영국 언론을 통해 ‘개구리 소년’으로 불린 이유다. 아버지 박성종씨는 “군말 없이 개구리를 잘 먹어 준 지성이가 고맙다”고 회상했다. 더 좋은 음식으로 몸 보신을 시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의미였지만 이러한 부모의 정성이 박지성에게 큰 힘이 되었다는 것은 불문가지일 것이다. 이처럼 ‘개구리 포획 작전’에 나선 가족들의 노력 덕일까. 박지성의 체격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입학할 무렵, 158cm에 불과했던 키가 2학년이 되자 170cm를 넘어선 것이다.
“이학종 감독님과 함께 훈련하면서 축구가 몸이 아닌 머리로 하는 종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박지성
1년 간의 체력 훈련과 향상된 체격 조건 덕에 2학년부터는 자연스럽게 기술훈련에 힘을 쏟게 됐다. 현역에서 은퇴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학종 감독은 선수들과 직접 몸을 부딪히며 연습 경기에 나섰다. 박지성은 이 과정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고 덕분에 상대의 움직임을 정확히 예측하고 수비수를 피해 절묘한 패스를 찔러 넣어주는 등 보다 다양한 플레이에 능숙한 선수로 성장했다. 6개월 만에 박지성이 주전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를 꿰찬 것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이 항상 잘 풀린 것은 아니었다. 1998년 겨울,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박지성에게는 그 어느 때 보다 짙은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K-리그 진출을 원했던 박지성에게 어떤 프로 구단도 손짓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수원의 2군 팀에 들어가기 위해 테스트를 받았지만 통과하지 못했고, 서울과 지방의 대학 팀에서는 그의 왜소한 체격을 이유로 영입 거부 의사를 전해왔다. 그렇게 낙담하고 있을때, 희소식이 들려왔다. 신입생 10명을 뽑을 예정이던 명지대에서 이학종 감독에게 선수 자리 하나가 비었다는 연락을 전한 것이다. 소식을 들은 이 감독은 명지대를 이끌던 김희태 감독에게 박지성을 강력 추천하고 나섰다, “두고 보면 알겠지만 크게 될 선수입니다. 2년 뒤에는 제가 고마우실 지도 모릅니다”라는 것이 이학종 감독의 추천사였다. 김희태 감독은 이를 받아들였고 천신만고 끝에 박지성은 명지대 축구부의 신입생 10명 중 마지막 멤버로 팀에 합류한다.
어렵사리 대학 축구 선수가 되었지만 박지성의 절망감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어느 팀도 자신을 원하지 않았다는 현실이 참담했고 한동안 ‘내가 그렇게 못난 놈인가’라는 실망감에 자책도 했다. 하지만 열패감을 되뇌이기에 그는 아직 젊었고 이내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났다. 절치부심하며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입증하겠다는 오기를 품은 박지성은 겨울 내내 뜨거운 담금질로 훈련을 거듭했다.
“올림픽 대표팀에 선발되면서부터 내 인생의 모든 행운이 시작됐다” - 박지성
명지대 축구부에 합류하자마자 울산에서 3개월간 합숙훈련을 거친 박지성은 김희태 감독으로부터 높은 점수를 받았다. 김 감독은 지구력은 물론이고 탄탄한 기초 체력을 갖춘 박지성에게서 애초 생각보다 큰 가능성을 보게 된다. 그는 훗날 “지성이를 가르쳐 본 지도자는 모두 그를 좋아할 것”이라며 박지성을 높이 평가했다. 김 감독은 이어 18세의 박지성을 연습게임에서 계속 주전으로 출전시켰다. 고교 시절의 혹독하고 성실했던 훈련 덕에 단번에 주전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 때 마침 허정무 감독이 이끌던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이 전지훈련 차 울산으로 내려왔다. 울산에서 조우하게 된 명지대 축구부와 올림픽 대표팀은 연습경기를 가지게 됐는데 이미 김희태 감독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던 박지성은 올림픽 대표팀과의 연습경기에도 선발로 출전했다. 그리고 이 연습경기는 이후 박지성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 계기가 됐다. 박지성은 왼쪽 윙백으로 출전해 평소 선망의 눈길로 바라만 보던 박진섭, 김도균 같은 선수들을 상대했다. 이 경기에서 박지성은 자신이 여전히 ‘체력’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부족한 점만 잔뜩 찾아낸 본인과는 달리 허정무 감독은 박지성의 뛰어난 체력과 경기를 지능적으로 풀어갈 줄 아는 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1999년 이른 봄, 박지성은 생각지도 않던 올림픽 대표팀 소집연락을 받는다. 만 18세, 아직 청소년 대표로도 한번 뛰지 못했던 무명의 박지성은 그렇게 첫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게 된다.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며 승승장구하던 박지성에게 이듬해인 2000년 5월 또 다른 낭보가 찾아왔다. 박지성은 19세의 나이, 대학생의 신분으로는 처음으로 교토 퍼플상가에 입단해 J리그 진출을 이뤄냈다. 이미 그 때 박지성은 이천수, 최태욱과 함께 ‘한국 축구를 이끌 10대 기대주’로 손꼽히며 최연소 국가대표로 뽑혔고, 19세 이하 청소년 대표팀과 올림픽 대표팀, 그리고 국가 대표팀까지 모두 세 개의 대표팀에서 활약하며 국제경험을 차곡차곡 쌓아가던 참이었다. 이런 각 대표팀에서의 활약상이 반영된 덕분인지, 박지성은 당시로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교토와 1년 계약을 맺었다. 당시 교토는 시즌 시작 전에 이미 3명의 브라질 용병들을 영입했지만, 강등권인 16위로 전반기를 마친 상태였다. 그리고 팀을 위기에서 구해 줄 구세주로 박지성을 선택했다.
“박지성 군은 가능성이 충분한 선수다. 두뇌 회전이 빠르고 운동량도 많다. 그리고 미드필드 어느 곳에서든 뛸 수 있다. 교토에서도 잘 해 주리라고 믿는다.” - 기무라, 당시 교토 퍼플상가 강화부장
박지성의 J리그행은 그에게 또 다른 성장의 기회를 제공했다. 축구 선수로 한창 성장하는 시기에 다른 스타일의 축구를 경험하고, 배울 수 있었다는 점이 특히 그랬다. 결국 이 모든 변화들은 이전까지 했던 노력들이 박지성을 ‘준비된 선수’로 만든 그 때,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올림픽 대표팀과 만나게 되면서 ‘천재일우’가 된 것이다. 그러나 박지성에게 찾아온 성공이 모두 행운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의 말대로 공평하게 주어진 기회를 누군가는 잡고, 다른 누군가는 못 잡는 차이는 ‘준비 돼 있는지 여부’에 달려있는 것이다. 어쩌면 지독히도 융통성 없이 모든 것에 그저 성실함으로 임했던, ‘항상 준비하고’ 있었던 그였기에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가 성공으로 연결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앞두고 가진 허정무 감독의 인터뷰는 이러한 대목을 재차 증명해준다. 당시 허 감독은 “지난해 박지성의 선발을 두고 명지대 김희태 감독과 친하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냐는 눈총을 받기도 했는데 그의 능력과 발전가능성을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고 밝혔다. 올림픽 팀의 다른 주전 선수들보다 2살이나 어린 박지성을 허정무 감독이 얼마나 믿고, 아꼈는지 알 수 있다. 허정무 감독은 박지성을 2000년 4월 국가대표로도 선발하며 두터운 신임을 드러냈다. 김희태 감독도 허정무 감독의 그런 결정을 “지성이는 하루하루가 다른 선수”라는 말로 변호하고 나섰다. 허감독은 올림픽 팀에서 박지성을 수비형 미드필더와 왼쪽 윙백, 오른쪽 윙어 등 다양한 포지션에서 활용했다. 그렇게 수비부터 공격까지, 여러 포지션에서 뛰어 본 경험은 박지성에게 큰 자산이 되었다. 미드필더 전 지역에서 뛸 수 있는 박지성의 능력은 멀티자원을 선호하는 현대축구의 특성에 맞는 것이었고, 그래서 박지성은 어느 팀에 가서도 주전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을 수 있었다.
올림픽 대표팀에 선발된 이후 박지성은 체격적으로도 놀라운 성장을 보였다. 170cm, 60kg이던 체격조건이 키는 6cm나 더 컸고, 몸무게도 10kg 이상 늘어나게 된 것이다. 볼을 다루는 센스와 넓은 시야에 체격까지 갖추게 된 그는 올림픽 팀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주전자리를 굳히게 된다. 박지성은 와일드카드로 선발된 김상식과 짝을 이뤄 중원을 장악하는 임무를 맡았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에는 김상식 외에 홍명보, 김도훈이 와일드카드로 뽑혀 합류했으며 이동국과 설기현, 이영표, 고종수까지 모두 포진해 있었다. 본선진출 과정도 순조로웠고, 멤버들 중 상당수가 이미 국가 대표팀에서 뛴 경험도 가지고 있어 사상 최초의 8강 진입이라는 목표는 충분히 달성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올림픽팀은 출국 전 아프리카의 강호 나이지리아와 가진 두 차례의 평가전에서 모두 5-1의 스코어로 승리하기도 했다. 은완코 카누 같은 스타플레이어가 빠진 상태긴 했지만 나이지리아 팀에는 네덜란드와 스페인 등 명문클럽에서 활약하던 선수들이 많았기에 만만히 볼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당시 나이지리아 대표팀을 이끌던 조 본프레레 감독은 올림픽팀과의 경기 후 “한국이 우리보다 올림픽 8강에 진출할 가능성이 높다”며 한국의 역량을 추켜세우기도 했다. ‘리틀 허정무호’ 올림픽팀은 상승세의 순풍을 타고 스페인과의 본선 첫 경기를 치르기 위해 호주 애들레이드로 향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자, 현실은 달랐다. 본선 B조에 한국과 함께 배정된 스페인, 모로코, 칠레 중 한국은 가장 까다로운 상대인 스페인과 첫 경기를 치러야 했다. 당시만 해도 유럽축구에 약한 모습을 보여온 한국으로선 큰 부담일 수 밖에 없었다. 또 호주에 도착하자마자 수비의 대들보로 팀을 이끌 것으로 기대됐던 홍명보가 허벅지 부상으로 아예 팀에서 빠지게 된 점은 크나큰 악재였다. 대체요원으로 강철을 급히 수혈해오긴 했으나, 안정돼야 할 수비라인이 강적과의 첫 경기를 앞두고 오히려 더 흔들리게 된 점은 한국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었다. 올림픽 대표팀 부동의 오른쪽 윙백 박진섭도 스페인 전을 앞두고 부상으로 결장하게 돼 수비전열은 전체적으로 흐트러질 수 밖에 없었다.
팀의 리더들이 부상으로 전력 이탈하게 되면서 올림픽 팀은 더욱더 심리적으로 위축됐다. 사비, 푸욜, 잠브로타가 버티고 있던 ‘무적함대’ 스페인은 23세 이하 정예 선수들로 구성됐으면서도 이미 프리메라리가와 세리에 A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선수들이 즐비했다. 상대 선수들의 명성과 스페인이라는 이름에 잔뜩 긴장한 한국은 중원을 완전히 장악 당했고, 수비라인이 무너지며 세 골을 허용해 0-3의 완패를 당했다.
“지성이를 가르쳐 본 지도자는 모두 그를 좋아할 것이다. 지성이는 하루하루가 다른 선수다”- 김희태, 전 명지대학교 감독
박지성은 수비형 미드필더로 선발 출전했지만, 중원에서 완전히 밀린데다 헛발질로 이탈리아 세 번째 골의 빌미를 제공하는 등 부진한 모습만 보였다. 기량차이가 너무 컸고, 경험 부족이 뼈아팠다.
첫 단추부터 잘못 꿴 박지성과 한국은 절치부심의 각오로 더 열심히 훈련에 임했다. 2년간 준비해온 올림픽에서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잔여경기인 모로코전과 칠레전에서 승리할 경우, 한국의 8강 진출은 아직 가능했다. 모로코전을 앞두고는 가장 성격이 활발한 이천수 조차 묵묵히 훈련에 임했다.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컸다.
배수의 진을 치고 임한 모로코전에서 한국은 이천수의 골로 1-0 승리를 거두며 희망의 불씨를 살렸다. 박지성도 전 경기의 부진을 털고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 적절한 압박과 매끄러운 공수전환 능력을 보여주며 맹활약을 펼쳤다. B조의 복병 칠레가 스페인에 예상 외의 3-1 승리를 거두며 8강 진출국을 가리는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언론들은 복잡한 셈법을 동원하며 한국의 8강 진출 경우의 수를 따졌고, 4골 차 이상으로 남은 칠레전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칠레에는 와일드카드로 출전한 팀의 ‘정신적 지주’ 이반 사모라노가 있었다. B조 첫 경기로 치른 모로코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했던 사모라노는 한국의 경계 대상 1호였다. 허감독은 심재원에게 사모라노 봉쇄의 특명을 내렸다. 박지성에게는 이영표와 함께 중앙 미드필더로 나서 협력수비로 칠레 공격의 핵 다비드 피사로를 꽁꽁 묶으라는 주문이 떨어졌다.
칠레와의 경기 전반 11분만에 이천수가 퇴장을 당하며 한국은 경기를 어렵게 풀어나가게 됐다. 그러나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던 한국은 오히려 더 공격적으로 나섰고, 27분 이동국이 선제골을 득점하는 데 성공했다. 박지성은 협력수비로 피사로를 봉쇄하는데 매진하면서도, 상대 수비라인을 무너뜨리는 침투패스를 찔러주며 선제골 득점에 관여했다. 그러나 수적 열세에 처한 한국으로서는 득점에 더 성공하기는커녕, 칠레의 역습을 막는 것만도 힘겨웠다. 결국 이동국의 골은 결승골이 됐고, 한국은 1-0으로 승리했다. 같은 시각, 스페인은 모로코에 2-0 낙승을 거두며 8강 진출을 확정 지고, 한국은 2승 1패의 좋은 성적을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골 득실에서 밀려 8강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첫 경기였던 스페인전 패배가 두고두고 아쉬웠다.
박지성이 시드니 올림픽에서 보여 준 활약은 수치상으로 두드러지는 것은 아니었다. 첫 경기인 스페인전에선 팀 전체의 부진과 함께 제 실력을 보여주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로코전과 칠레전에서는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며 중원을 장악하는 데 최고의 수훈갑으로 활약했다. 상대의 공격이 끊어지고, 우리의 공격이 시작되는 곳에는 어김없이 박지성이 있었다. 이제는 영국 언론으로부터 ‘이름없는 영웅(unsung hero)’이라 불리곤하는 맨유에서의 박지성의 모습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은 박지성이 경험한 첫 국제대회였고, 19세로 아직 어렸던 그에게는 실패로 인한 절망감 보다는 좋은 교훈을 얻는 계기가 됐다. 박지성은 ‘무적함대’ 스페인과 직접 맞서 싸우며 유럽선수들의 기술과 힘 그리고 뛰어난 경기 조율능력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이기지 못할 상대’로 생각되지도 않았다. 박지성은 한국이 충분한 경험만 얻는다면, 스페인도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과 함께 희망을 가졌다. 그리고 2년 뒤인 2002년, 월드컵 4강에서 스페인을 만나 그 희망을 현실로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