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8. 30. 00:19ㆍ예술/미술 및 건축
추사 김정희 선생 (1786 ~1856) 유배지 및 그 옆 기념관은 대정읍성이라는 곳에 있다.
산방산에서 가까운, 제주도 서남부 지역이다.

.
네이버 지도
제주추사관
map.naver.com
.

.
김정희 선생은 추사체라는 글씨로 널리 알려진 서예가이지만,
금석문 연구가이자, 문인화가이기도 했다.
이 곳에 그의 대표작인 세한도의 복사본이 걸려 있다. 원본은 국중박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
세한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아래,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 추천 소장품 소개글에.
https://www.museum.go.kr/MUSEUM/contents/M0501000000.do?schM=view&relicRecommendId=623104
Home
국립중앙박물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www.museum.go.kr
.
세한도는 1844년 제주도 이 자리에서 제작되어 이후 여러 사람의 손길을 거쳐 최종적으로 2020년에 손창근 선생이 국중박에 기증하였다. 제주도 --> 조선 --> 중국 --> 일본 --> 한국 이렇게 장소만 해도 여러 곳을 거쳤으며, 이 세한도에 여러 사람이 감상평을 덧붙여, 엄청 긴 두루마리가 되어 버렸다고 한다. (한국과 중국의 문인 20명이 22편의 감상글을 써서, 전체 길이가 14.7m에 이른다고..)
.

원래 세한도는 55세의 당시로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고령의 나이에 제주도로 유배를 간 김정희가.. 3년의 세월을 제주도의 유배지에서 문 밖으로 나가지 못하며 보내던 중, 그를 챙겨 주던 제자 중국어 통역관 이상적(李尙迪, 1804~1865) 에게 글자와 함께 그려준 것이다.
이상적은 구하기 힘든 책들을 중국에서 구해서 지속적으로 추사에게 보내주었는데, 세도정치의 틈바구니에서 추사를 따르던 많은 지인들이 떨어져 나간 상황에서 변함 없이 신의를 지킨 제자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시한 것이었다.
논어에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추워지고 나서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는 뜻이다.
그림은 매우 단순화되어 있는데 특히 가운데 집은 거의 뭐 초등학교 저학년 보고 집을 그리라고 하면 나올법한 정도의 단순성을 보여준다. 그린 사람이 추사라서 다르게 보이는 것 뿐...

춥고 황량한 겨울이라는 것이 소나무와 측백나무 및 그 주변 땅을 그린 그림에서 느껴진다.
이게 이 그림의 beauty 중 하나이다.
추사는 마른 붓을 가지고 이런 표현을 해냈다. 이게 그의 연륜과 기교였다.
.
여름에는 모든 나무가 다 푸르기 때문에 다 비슷해 보이지만, 겨울이 되어 험난한 환경이 지속되면 소나무와 측백나무만이 계속 푸른 것이 제대로 드러나게 된다. 어려울 때 나를 대하는 것이 변함 없는 사람의 소중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
내 나이가 추사의 나이와 비슷해 진 시점에서 가슴에 깊게 와 닿는 것이 있다.
석렬이 형도, 김건희 여사도 아마 비슷한 심정을 느끼고 있겠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배신했으니. (그 가장 앞줄에 한동훈이 있다...)
변치 않는 마음은 정말 소중하다. 그렇지만 기대하기 힘든 것도 사실. 세상 인심이라는게 그렇다.
.
추사는 수선화를 참 좋아했다.
기념관에도 수선화부 라는 탁본이 전시되어 있는데, 왼쪽의 그림이 있는 부분은 추사가 아닌 제자 조희룡의 작품으로 보여지며, 오른쪽도 글의 원래 내용은 청나라 호경이라는 사람이 지었는데 내용이 좋아 추사가 다시 글로 적은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원래 더 긴 내용인데 앞쪽만 탁본이 되어 있다고.. 이걸 이렇게 전시하는게 맞나 모르겠다. 모르는 사람은 다 추사 글이라고 생각할텐데...

.
수선화는 원래 조선 토착 식물이 아니고 청나라를 통해서 들어온 것이다.
추사가 수선화를 처음 본 것은 24세때로,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에 갔을 때라고 한다. 이때부터 청초한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고 하는데, 55세에 제주도에 귀양을 가고 보니 제주도에 자생 수선화가 지천으로 피어 있어서 너무 좋아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제주도 사람들에게 수선화는 그냥 잡초였는지, 농부들은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마구 파헤쳐 버리는 상황이라... 추사가 그걸 안타까워 해서 쓴 글도 남아 있다고.
서민의 삶과 귀족의 삶, 그리고 그에 따른 시야가 다른 거지... 아무리 귀양 왔어도 추사는 도련님이니까.
제주도 사람들이나 추사나 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고 인정된다. 난 추사 쪽에 가깝긴 하지만.. ㅎㅎ
(내가 도련님은 아니지만, 아름다운 것을 함부로 취급 하는 것이 거슬리는 편이다.)
.
지금은 사라진 것 같은데, 주변에 수선화라는 찻집도 있었다.

.
추사관 출입구.

.
추사가 돌아가시기 3일 전에 쓴 최후의 글씨. '판전'
서울 봉은사 판전 현판이라고 한다.

.

.

.
귀양살이 중간인 1846년 61세에 충남 예산 화암사에 예서체로 써서 보낸 현판 글씨 탁본. '무량수각'

.
해남 대둔사 무량수각 현판 탁본. 비교해 보면 큰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이 글씨는 제주도로 유배오던 길에 썼는데, 55세의 글이다. 그렇다면 약 9년의 유배생활이 글씨에 끼친 영향을 볼 수 있겠다.

이후에 이거보다 글씨가 홀쭉해진 건 확실하다.
초의 스님에게 자신의 이 글을 걸고, 이광사라는 분이 쓴 '대웅보전' 이라는 글씨를 떼어내라고 했다는데, 비록 귀양길이지만 이때만 해도 자신감 뿜뿜한 추사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나중에 8년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돌아가는 길에 다시 대둔사에 들렀는데, 그때는 자신의 이 글을 떼고 이광사의 현판을 되돌려 놓으라고 했다고 한다. (지금도 이광사의 글이 걸려 있다고 한다.)
귀양이 그의 정신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친 것일가?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겠다.
그의 대표적 서체인 추사체는 이 귀양살이 중에 태어났다.
.
고관대작의 삶을 살다가, 이런 초가집에서.. 그것도 제주도에서 8년이라니... 그의 마음이 어땠을까?

.

.
각잡고 쓴 글이 아닌 편지의 글씨체도 흥미로왔다. 그냥 막쓴 글씨도 명필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