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쿠리코 언덕에서 - 까르티에라탱

2020. 9. 13. 01:10책 & 영화

안보고 지나갔다가 역시 넷플릭스 찬스로 보게 된 애니. 

 

평이 안 좋았기에 크게 기대하지 않고 봤다가... 너무 취향저격이어서 깜짝 놀랐다. 

 

배경은 1963년 요코하마.  1년 뒤에 도쿄 올림픽이 열리는 일본의 60년대 초반이다. 

 

러브라인도 상당히 달달하고 매력적이었지만, 오늘은 중심 테마 중 하나인 부활동 건물 '까르티에 라탱' 살리기에 대해, 더 정확하게는 건물 자체에 대해서 쓰고자 한다. 

 

이런 투샷이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공간. 

 

배경이 사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실적임

 

느낌 상으로는 대학교의 오래된 동아리방 같은 느낌이 더 강하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고등학생의 환경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을 봐도 알 수 있지만, 저 시절에는 고등학생이 오늘날의 대학생보다 더 높은 수준의 사고와 공부를 했었다고도 볼 수 있다. 진학을 위한 시험 기술을 연마하기 위한 공부와, 취업을 위한 스펙을 쌓기 위한 공부에 매진하는 현대의 고등학생, 대학생들은 저 시대의 고딩 대딩들하고 게임이 안되는 수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저런 그림 너무 좋다. 

 

매우 레트로하고, 빈티지하면서도, 아름다운 느낌.  

 

왠지 나도 저런 시절을 겪었을 것 같은 그런 느낌.  (나는 좀 뒷 세대다.) 

실제로 존재했을 것 같은 공간이다

 

선배가 있는 까르티에 라땡 편집실 (건물 이름이기도 하고 간행물 이름이기도 하다) 까지 가는 건물 내부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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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rtier Latin은 라틴지구라고도 하며 소르본 대학등 대학가가 모여 있는 센느강 좌안 쪽을 부르는 명칭이다. 프랑스 혁명전까지 대학교 구성원들이 라틴어로 대화를 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상당히 애니메이션의 주제와 잘 어울리는 명칭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고등학생이 이런 문화나 명칭을 접하거나 쓸 수 있는 그런 수준이 아니다.) 

 

모두 남학생들밖에 없다는 설정이다. 이건 또 신기한데, 부활동을 저 시절에도 남녀가 같이 했을 텐데.. 아마 저기 모여 있는 부들이 여학생들에게 전혀 인기가 없는 부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건물 자체도 낡고 지저분해서 건물 때문에도 여학생이 접근을 안했을 듯. 철학 연구회에서 여자애들을 신입부원으로 받으려고 하는 장면을 보면 규칙으로 막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건물 내부에 가건물들이 여기저기 있는 구조이다. 뭔가 해적선 같은 느낌도 난다. 

 

여기저기 거미줄이 늘어져 있는 것에서 보듯이 청소와 정리가 안되어 있는 공간이다. 

 

저 지저분함에 다수의 여성들과 일부 남성들은 불편함을 느끼겠지만 나는 '먼지한톨도 귀중한 유산'이라고 하며 저 어지러움을 방치하는 논리가 이해는 간다. 

고전음악 연구회도 있고 러시아 문학 연구회도 있다. 공동 공간에는 책들이 많이 쌓여 있다. 

 

창의성이 높은 사람들 중에 책상과 업무공간이 엄청 지저분한 경우가 많다.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지저분한 것으로 보이지만, 정작 그들은 어떤 문서나 책이 어디에 있는지 머리 속에 다 들어있다. 그냥 한 눈에 그것들을 인지하는 상황에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럼 서류함과 설합과 책장에 가지런히 정돈된 상황과 뭐가 다르냐고 한다면, 그 서류가 그 위치에 놓이게 된 상황까지 머리 속에 일련의 과정으로 들어 있는 것이다. 

 

업무중에 발생한 모든 프로세스가 공간과 융합되어 있기 때문에 매우 생산적으로 일을 할 수 있고, 그런 어지러운 공간과 사물의 복잡성이 한번에 기억을 다 해낼 수 있도록 보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물론 내가 무조건 지저분한 것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게으름 때문인 경우도 있고, 어지러짐이 너무 과도하면 결국 뇌의 한계를 초월하게 되어 그때부터는 의미 없는 쓰레기장이 될 뿐이다. 

 

따라서, 일정 수준에서 업무를 마치면서 한 번 정리하고, 또 어지럽히고, 정리하고를 반복할 필요가 있다. 무질서함이 끝없이 계속 증가한다면 그건 아마도 무질서에 뇌가 잡아먹히고 있는 중일 것이다. 

 

응, 이런 공간 감각과 무질서함

 

얘네들은 화학 실험을 하고 있었다.  즉 인문적인 분야 뿐 아니라 과학기술 분야도 활발히 탐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균형이 정말 중요한데, 이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태양의 흑점을 10년간 관찰해온 녀석들이라든지, HAM으로 통신하고 있던 녀석들이라든지... 또, 저 간판은 미술부다. 예술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프랑스 문화에 대한 이해를 볼 수 있는데, 애초에 건물 이름도 그렇고 애니 제목 자체가 불어이다. 

 

코쿠리코coquelicot   불어로 개양귀비 꽃이다.  다른 말로는 우미인초. (초패왕 항우의 애첩이 우미인이다. 패왕별희에서 그 '희'가 우희, 즉 우미인) 동명으로 나쓰메 소세키가 쓴 소설이 있다. 연애와 여자의 심리에 대한 소설인 것 같은데, 난 내용을 안봐서 잘 모르겠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코쿠리코라는 말로도 뭔가 느껴지는 게 있지 않을까? 

 

프랑스의 살롱 문화도 그렇고, 계몽주의 시대를 선도한 나라이고 만국박람회를 처음으로 개최한 나라이기도 하다. 프랑스에서 만개했던 학문과 예술의 다양한 모색과 통합이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 유행했던 사조는 실존주의 였고 역시 사르트르같은 프랑스 쪽 철학자들이 주도 했다. 

 

바닥에 쌓여 있는 문서들. 곳곳에 붙어있는 표지판들. 그리고 책들. 

 

어쨌든 이 2명의 여고생들은 이 모든 것을 뚫고 3층에 있는 고고학부 내의 편집부까지 길을 재촉한다. 

 

방에 있는 고딩 2명이 어딘가 외국과 교신하고 있는 HAM

 

나는 그림이 주는 시각적 자극에 의해 뇌가 지적으로 자극받는 그런 경험을 했다. 

 

하숙생 언니가 그리는 추상화도 사실 그런 자극을 주긴 했지만, 저 클럽활동을 위한 오래된 건물의 공간과 사물과 아이들이 주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아이러니한 것은, 철거될 예정이던 저 건물이 청소와 보수를 통해 이사장의 결정 번복을 이끌어내었다는 점이다. 

 

청소에 여학생들이 대거 참여하고, 그 과정에서 여학생들이 까르티에 라땡 건물을 매우 좋아하게 되면서 철거 반대로 여론이 바뀌고 하는 과정도 나름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저게 바로 정치고 소통이구나! 

 

일부 천재들에게는 지저분한 공간이 필요하지만, 세상과 소통하려면 역시 정리되고 깨끗한 공간이 더 효과적인 것이다. 

 

그들도 철거를 막기 위해서 자신들의 불편을 감수하고 변화를 감내했다. 이 것도 좋은 포인트. 

 

우리나라 정치가 이와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학생회장으로 정치의 대가인 안경선배와 까르티에 라땡 편집장인 남주 슌. 

 

스마트한 안경 선배. 그리고 뒷모습이지만 엄청 훈남인 남주 

 

개인적으로는 계몽기의 프랑스 파리도 좋지만, 약간 뒤쪽으로 20세기 초반의 비엔나를 정말 좋아한다. 

 

동서양이 만나고 과거의 제국과 미래의 공화국이 겹쳐지며 철학, 과학, 심리학 전반에 걸쳐 엄청난 천재들이 모여 바글거리던 시공간. 

 

그러고 보니 비엔나에서는 까페 문화가 있었구나. 프랑스가 살롱문화 였다고 한다면, 비엔나에서는 까페에서 담배를 피워대며 사람들이 밤늦도록 토론을 하곤 했다. 

 

'코쿠리쿠 언덕에서'는 파리와 비엔나의 시공간이 주는 지적 자극이 (애니에 직접 나오지는 않는다만) 1960년대 고등학생의 시대상과 연결되면서 아련한 향수와 동기부여를 주었다. 

 

개인적으로 인생 애니메이션을 만났네.  

 

다만 네이버 평점이나 블로그 등 보면 역시 반일에 기반한 부정적인 시각이 많이 보인다. (한숨) 

 

우리가 잊지 않는 것은 좋은데, 이런 식으로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오히려 역효과라고 생각한다.  너무 1차원적 증오심에 머물러 있는 느낌.  

 

나는 이런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일본의 저력에 오히려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고맙다. 이런 작품을 만들어 줘서. 

 

과거를 잊자는 것도 일본이 잘했다는 것도 아니지만, 제대로 가치를 보지 못할 정도로 편협한 마음은 개인에게도 국가에게도 좋지 않다고 본다. 없는 것을 지어낸 것도 아니고 여주 아버지가 한국전쟁에 휘말려 죽은 것을 미주알 고주알 변명하고 반성하고 한국민에게 미안함을 표출하고 할 일은 없는 것이다. 오히려 반전 메시지가 강한 애니인데 이렇게 비난하는 것은 '바람이 분다'에서도 더 심하게 목격한 바다. 

 

국민들이 건전한 철학을 가지고 품격을 지닐 수 있으면 좋겠다.  국민소득 3만불이 선진국인게 아니다.  갑분교육비판이지만, 일본은 저런 토양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스펙이나 쫒고 점수 획득 기술이나 연마하고 있어서는 더 나아갈 수 없다. 나는 일본을 비판하기 보다는 이런 자극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