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quencing - 홍성덕 작가

2021. 9. 26. 02:46예술/사진이론

좋아하는 작가이자, 내 사진 선생님이기도 한 홍성덕 작가의 사진전을 보러 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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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 대로변에서 살짝 들어온 위치의 오래된 건물 2층에 있는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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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뜻한 포스터와 낡은 건물이 역설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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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의 서브 메인 정도 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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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작품이 나란히 있을 때 느낌이 극대화 된다.  왼쪽은 연한 연두색이라면 오른쪽은 진한 초록색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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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자세히 살펴보면 사실 두 사진은 동일한 대상을 찍은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아래가 바뀌었을 뿐이지 기본적인 모양이 거의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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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인적으로 왼쪽에서 10대~20대의 생명력과 역동감을, 그리고 성장과 가능성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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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오른쪽에서는 전성기의 강렬한 힘을 느꼈다. 이미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고 번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직도 한동안은 더 최고의 자리에 머물러 있을 것 같은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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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및 예산 문제로, 둘 중의 하나를 소장하려고 생각했을 때, 상당히 고민을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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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더 가는 것은 왼쪽 사진이었지만, 내 현재와 맞고 내가 골라야 하는 것은 오른쪽 사진이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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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여린 것보다 강한 것을 선택해서 오른쪽 사진을 선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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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도착하고 보니 느껴지는 생명력과 힘이 장난이 아니다. 역시 맞는 선택이었다.  내가 이 시점에서 여린 성장 가능성을 우선할 상황은 아닌 것이다. 집에서 내가 늘 지켜 보면서 힘과 기운을 얻을 사진은 이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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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둘 다 있으면 더 조화로왔겠지만, 우리는 언제나 선택을 해야 한다. 그게 결국 인생의 비극이자 묘미이다. 

 

집 책상 앞 벽에 걸려 있는 작품 (사진은 전시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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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 제목은 Sequencing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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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노트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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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현상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생명체는 쉼없이 움직여야 한다. 쉼없이 움직여야 하는 것은 연속된 작용들이 쉼없이 일어나고 있는 절대적 과정이다. 우리의 생각 또는 상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과 속도로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연속 작용은 쉼 없이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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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quencing은 동일한 결과를 내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쉼 없는 작동으로 계속적인 변화의 결과가 생명현상의 궁극의 원리이며 생명의 가장 기봊넉인 속성인 쉼 없는 과정의 반복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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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체의 단순한 변화를 연속된 이미지로 담아 생명체 스스로가 작동되는 쉼 없는 과정을 배경없는 옥수수 잎만으로 생명현상의 성실함을 표현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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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덕 선생님 작품을 처음 봤던 것이 연잎 작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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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 말라 비틀어진 연잎을 매우 집요한 시선으로 사진에 담았던 작품들로 뭔가 인생이 느껴지고 여백이 느껴지는 그런 작품 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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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궁궐이라든지, 대나무 잎이라든지, 매화, 미인도 등 다양한 작품을 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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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작품의 코어를 이루는 것은 조선이라는 시기와 국가 그리고 그 문화, 더 나아가서는 조선으로 대표되는 우리 한민족의 정체성과 특성의 이해를 사진이라는 작업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고 이해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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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비슷한 시기에 이 옥수수 작업들도 봤었는데, 전시회에서 본 옥수수는 우리 민족을 넘어서 인류 보편적인, 그리고 더 전진하여 생태와 환경에 대한 이야기,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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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바람직하고 자연스러우며, 이유있는 발전이고 진화라고 생각된다. 물론 그렇다고 조선을 그린 작품들의 의미가 떨어진다는 것은 아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장축으로의 인류와 환경, 생명, 생태가 있고 그 장축에 올라가는 구체성으로서의 조선, 그리고 다양한 작품군들이 존재하여 비로소 선생님의 작품 세계가 씨줄과 날줄처럼 구조적 안정감을 쌓아 올린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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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메인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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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옥수수 잎으로 생명을 표현하면서도, 내 눈에는 붓으로 그린 하나의 획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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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줄과 날줄 정도가 아니라 하나로 융합되서 구별하기 힘든 하나의 개성이 된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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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옥수수 이파리에 나타난 수많은 생명의 선들과 그 뒤에 잠재하는 생명의 흐름은 Sequencing이라는 주제를 통해 우리에게 벅차게 달려오는 듯 하다가도, 붓글씨나 조선 회화의 정적인 고요함으로 멈춤과 여백, 그리고 명상의 시간을 주기도 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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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으로, 나는 생명력과 번성의 옥수수 잎 작품을 눈앞에 보며 좋은 기운을 받아 행복한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이게 예술의 실용적인 힘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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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quencing이라는 것은 DNA 염기서열을 의미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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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A의 구조가 이중나선 구조인것 처럼 작품 속의 옥수수도 그런 느낌이 나기도 하고, 혹은 Infinity 기호를 닮기도 했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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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과 생명이 형태로 보여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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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왜 옥수수 잎인 것인가? 옥수수는 작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며,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고 지방의 주요 공급원이 될 수 있는 식물이다. 인류는 옥수수를 수확량이 많게, 더 맛있게, 더 잘자라게 끊임없이 개량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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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유전자 공학이 발달하면서, 유전자 가위 기술 등으로 유전자 조작을 통해 옥수수가 가진 약점을 없애고 좋은  결과만을 가진 품종을 만드는 연구가 활발해 졌고, 유전자 조작은 의도와는 달리 많은 부작용을 낳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장은 좋은데 장기적으로 문제가 크다고 해야 할까? 오랜 세월 동안 자연적으로 개량을 하는 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문제인데, 유전자 조작의 대표적 식품이 옥수수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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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은 깊이 조사하지 않았지만, 오리지널 옥수수 품종을 보존하고 지키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것이다. 유전자 조작의 주요 대상이 될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작물인 옥수수. 그래서 더욱 생명력이 강한 건강한 옥수수 품종을 지키는 것의 의미가 더욱 커진 옥수수. 그 옥수수의 잎을 담은 작품은 그래서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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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기회이기도 하지만 위험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복잡한 이야기들을 구구절절 쓰는 것 보다는 그냥 Sequencing이 염기서열 혹은 염기서열 조작을 의미하는구나 정도를 이해하고 그 다음은 각자의 분량대로 깨닫는 것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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