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졸 기술 전문가 vs. 서울대공대 독일박사

2021. 4. 8. 23:57전략 & 컨설팅/전략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는건 아니고, 내가 겪었던 하나의 사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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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종은 첨단 제조업이라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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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졸 기술자분은 이사였고, 서울대공대 나와 독일 명문대 공학박사까지 하신 분도 이사였다. 연배는 고졸 이사님이 훨씬 더 많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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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 다 연구개발 쪽 임원이었고, 인터뷰를 꽤 intensive하게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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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고졸 이사님은 인사이트가 너무 좋아서 3시간은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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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고 졸업하고, 회사에서 일본으로 기술연수 보내서 일본 기술 배워서 (제대로 가르쳐 줬을 리가 없지만, 이리저리 해서 결국은 습득했다고) 결국 일정 수준 이상의 제품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사실 이건 거의 한국 제조업 전반이 공유하는 흐름이다. 일본 기계 들여오고, 일본 기술자들 모셔와서 거들먹 거리는 거 비위 맞춰 가며 조각 조각 배워서 이어붙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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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 70년대에는 머리가 좋아도 대학을 못가는 사람이 많았다. 못살았으니까...  그런 분들이 고졸 생산직으로 들어왔어도 결국은 변화를 만들어내고 가치를 창출해 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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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서울대 이사님은 말은 참 잘하는데, 비교해보면 인사이트는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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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졸 이사님은 어눌한데 계속 듣다보면 너무 흥미롭고, 서울대 이사님은 달변인데 재미만 있고 건지는게 없는.. 그런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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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고민은 고졸 이사님이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경영진하고 친한 건 서울대 이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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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서 연구소장 발표가 있었는데, 서울대 이사님이 승진하면서 연구소장이 되었고, 고졸 이사님은 그해 말에 퇴직 당해서 집에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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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때 이 회사가 계속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겠구나라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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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회사 입장이 이해가 안가는 건 아니다. 커뮤니케이션 잘되는 서울대 공대, 독일 명문대 박사를 연구소장 자리에 놓는 것이 대외적으로도 얼마나 보기 좋은가? 어차피 경영진도 SKY출신이 많고 고졸 출신은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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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영진 중에서 고졸 이사님의 말을 제대로 귀기울여 들어보고 이해한 사람이 과연 있었을지 솔직히 의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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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인사권이 있었다면 나는 고졸 이사님을 연구소장으로 하고 서울대 이사님이 지원을 하도록 했을 것이다. 그러면 회사의 연구개발 기초체력은 많이 올라갔을 것이고, 제품력도 5년 이내에 많이 좋아졌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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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2020년대의 한국을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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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없어서 대학에 못가는 사람도 있기는 하겠지만,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공부 못해서 대학 못가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것 같다. 대학이 넘쳐나는 상황이니까.. 오히려 중국 유학생으로 빈자리를 채우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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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제 현장에 가보면 고졸이나 전문대졸 직원들이 들어오는데, 예전하고는 역량이 많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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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발전하고, 국민들의 평균적인 지적 수준도 올라갔는데, 고졸 생산직이라는 카테고리에 한정해서 보자면 이 집단의 퀄러티는 현저히 저하된 상황이다. 똑똑한데 대학 못간 사람이 거의 없는 사회니까. 따라서 현장에도 대기업의 경우에는 전문대졸/대졸 직원들이 넘쳐나는 상황인데, 이 사람들의 수준도 예전 공업고등학교 나온 사람들 수준에 훨씬 못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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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나라가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바탕에, 똑똑한 고졸 숙련공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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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아무리 이러쿵 저러쿵 해도 제품을 만들고 현장에서 개선을 이루는 것은 이런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제, 자동화나 로봇 같은 것도 많이 도입이 되고 사람의 관여가 많이 줄어든 데다가,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의 수준도 낮아지다 보니까 (학력은 높아졌지만 역량은 떨어짐) 현장의 우수성이 잘 보이지 않는다. 90년대 2000년대까지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가닥으로 돌아가는 거지, 개선하고 발전하고 하는 건 별로 없다. 오히려 퇴보하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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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건 밖에서나 위에서 잘 안 보인다. 이제 60년대생들이 대거 퇴직하고 나면 현장의 삐걱거림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그때서야 문제가 발생하면 좀 보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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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발전 단계라는 측면에서 보면, 우리가 2000년대까지 제조업 중심으로 성장을 했고, 이제는 금융, 플랫폼, 전문 서비스 같은 서비스업 중심으로 성장을 이뤄가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니 똑똑한 사람들이 이런 쪽으로 몰리는 게 당연하기도 하고, 바람직하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상황을 보면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의 성장은 더디고, 제조업은 쇠퇴하는 매우 바람직하지 않은 흐름이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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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고부가 서비스업에 실패한 것은 일본이 우리보다 먼저 경험했다. 그쪽은 아직 미국과 유럽의 시장이다. 돈많은 일본도 금융에서는 제3세계일 뿐이었다. 물론 자금력으로 금융위기때 미국 선도 은행들의 지분을 상당히 확보하는데 성공하기는 했지만, 거기까지인 것으로 보인다. 이제 일본을 벤치마킹해봤자 전혀 도움이 안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헤매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의 성장은 일본을 베끼는 것으로 비교적 손쉽게 달성할 수 있었다면, 이제는 독자적으로 Domain을 구축해야 하는데 그럴 능력이 안된다. 교육도, 제도도, 사람도 다 구닥다리라서 단기간에 뭘 어떻게 바꿀 수 없는 상황이다. 일본이 실패한 것들을 그대로 베끼고 있는 우리 정부를 보면 정말 학습능력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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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희망은 있다. 예를 들어 문화 쪽으로 우리가 꽤 잘하고 있는 것 같다. 문화는 소프트 파워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코로나 이후로 한국의 대응 수준이 알려지면서 한국에 대한 글로벌 인식도 급격히 개선되었다. 국민의 힘이다. (미국이나 유럽의 형편없는 대응을 보면서 우리 수준이 꽤 높구나라는 자신감을 가지게도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백신을 개발하지 못했다. 제약이나 의료기기 쪽으로는 우리가 아직 수준이 낮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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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나라들은 자기가 잘하는 업종이 대략 정해져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로 보면 일본의 아류였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은 소프트웨어와 플랫폼, 항공우주, 제약 등을 장악하며 미래를 탄탄히 하고 있다. 금융은 미국의 수퍼 파워의 핵심이다. 우리는 조선, 메모리 반도체, 가전, 자동차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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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흥망성쇠도 인재와 문화, 리더십에 기인하는 바가 절대적이라고 본다면,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일본과 비슷했던 옷을 벗어던지고 미국과 비슷한 옷으로 갈아 입을 수 있느냐가 될 것이다. 아니면 독자적인 다른 옷을 지어입던지? 이건 시간도 걸리고 매우 성공하기 어려운 과제이다. 세계사에서 이런 일에 성공한 나라는 아직 없다. (약간 관대하게 보자면 프로이센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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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의 비율이 어느 국가에서나 대략 일정하다고 본다면, 문제는 이 인재들을 어떻게 제대로 성장시키고 가장 핵심적인 자리에 안착시키냐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사회가 이런 저런 문제가 많긴 하지만 성과주의 자본주의의 힘으로 안착비율이 50% 이상은 되는 것 같다. 더구나 이민은 미국의 큰 장점인데, 미국에 이민 오는 사람들은 그래도 자기 국가에서 상위권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모수가 달라진다. 인구대비 인재의 수가 가장 많은 국가는 아마 미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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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 아시아에서는 어느 정도 인재의 블랙홀... 까지는 아니고, 백색왜성? 정도의 역할은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문제는 단일민족이라는 정체성과 이민 정책이 받쳐주지를 못해서 미국 수준의 밀집도를 보여주지는 못할 것 같다. 그렇다면 안착 비율이 높아야 되는데, 공무원 시험에 수십만명이 몰려있는 것만 봐도, 안착 비율은 높지 않은게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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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교육제도, 교육 내용, 성공의 기준, 성공의 과실, 사회적 인식, 사회의 가치 등 수많은 것들이 바뀌어야만 우리가 이 정도에서 정체되지 않고 다음을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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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식 평등주의는 안된다. 사회주의 계열은 과실이 있을 때 그걸 평등하게 나눠먹는 거라 쇠퇴의 이론이다. 단, 자본주의나 능력주의가 너무 살벌하고 경직되게 흐르지 않도록, 보완해 주는 정도의 역할은 필요하다. 절대 주류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건 나중에 내가 공식으로 만들어서 보여줄 수도 있을 것 같다. 동정과 연민은 중요한 감정이지만, 쉽게 변질되고 사회를 병들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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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을 모르는 이론가는 잘못된 결정을 내리곤 한다. 이게 일종의 사이클인데, 국가가 낮은 곳에서 성장해 나갈 때는 현장을 잘아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같이 성장하면서 이론가/결정권자가 되니까 의사결정도 빠르고, 효과적이다. 나라 전체에 활기가 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성장하고 나면 더럽고 힘든 현장에서 능력있는 사람들이 사라진다. 그 사람들은 다 책상 앞에 앉아있다. 즉, 개고생하며 국가를 성장시킨 세대의 자식이나 손자 세대인데, 이들은 편하게 높이 올라갈 옵션들이 많아지면서 현장과 멀어진다. 그러면 국가는 성장이 정체되고 병신같은 분위기가 넘쳐나게 된다. 이런 무능이 한도를 초과하면 국가가 망하든지,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다시 되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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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고졸 이사님과 서울대 공대졸 독일유학 박사님 사례를 가지고 대략 이런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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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다음 단계로 성장하는 나라가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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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야 어린 친구들이 희망을 가지고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