흄 David Hume 의 회의론

2015. 7. 25. 06:51철학

데카르트 (Rene Descartes, 1596~1650) 는 매우 중요한 철학자이다. 

 

화이트 헤드는 말한다. "유럽 철학이 플라톤에 대한 각주라면, 근대 유럽 철학은 데카르트에 대한 각주이다."

 

그렇지만, 데카르트는 근대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의심하는 나'의 존재를 기반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그 뒤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데카르트를 '마지막 중세인이자 최초의 근대인'이라고 하는 이유이다. 

 

철학의 관심을 인간으로 향하게 했으나, 그 자신은 신에게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노파심에서 이야기 하자면,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현대적인 것이고, Cool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신의 존재를 믿는다. 그냥 서양 철학의 흐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설명하는 것 뿐이다.)

 

아뭏든, 그래서 일단 데카르트를 간략히 건너 뛰고, 영국 경험론, 그 중에서도 특히 흄으로 넘어간다. 

 

에딘버러, 스코틀랜드: 흄은 스코틀랜드 사람이고 에딘버러 근교에서 태어나 에딘버러 대학을 다녔다. 영국의 철학자라고 소개하면 흄이 매우 섭섭할지도 모르겠다. 비록 '영국사'라는 대규모 저술을 남기기도 했지만 말이다.

 

'객관성'에 대한 흄의 공격은 칸트를 자극하여 객관적 지식에 대한 그의 진지한 연구를 촉발하였고, 지식의 본질에 대한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성찰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것은 칸트를 제대로 들여다 보기 위한 사전 작업이다. 

 

 

흄 (David Hume, 원래는 Home, 1711~ 1776)은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태어났다. 

 

" 판단력이 있는 배운 사람이라면 최고의 신뢰를 받으면서, 정확하고 심오한 추론이라고 자부하는 체계가 얼마나 허약한 기초에 놓여 있는지 쉽게 알아차릴 것이다. 단지 믿음에 기초한 원칙들, 이로부터 서투르게 끌어낸 결론들, 정합성이 부족한 부분들, 확실성이 결여된 전제 등은 가장 저명한 철학자의 체계 여기저기에서 접할 수 있으며, 철학 자체를 불명예스럽게 만들고 있다."   [인간본성론] 서문인간 본성론 A Treatise of Human Nature은 흄이 23살에 준비하기 시작하여 29살에 완료한 저술이다. 그 시절에는 대학을 일반적으로 14세에 입학했고, 흄은 12세에 입학했다고는 하지만 꽤 빠른 진도라고 볼 수 있겠다. 흄이 젊은이 다운 야심을 가지고 공격한 부분은 무엇이었을까? 
▣ 인간의 자아에 대하여흄은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합리주의자와 달리, 인간의 본성은 욕망이고, 논리보다는 욕망이 인간의 행동을 지배한다고 보았다. 그는 또한 선천적인 관념 innate ideas (본유관념이라고 번역하는데.. 참 말이 어렵다.  경험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 개념) 을 부정했고, 인간은 그가 직접 경험한 것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귀납적 논리와 인과관계의 필연성에 대한 근본적인 공격을 가했다. 그의 결론은 인간이 '자아'에 대한 실질적인 개념이 없고, 오직 자아와 관련된 감각의 다발들  a bundle of sensations associated with the self 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데카르트의 자기 동일적 실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인식을 흄은 오류라고 본다. 즉, 자기 동일성에 대한 확신은 흄에 의하면, '허구'인 것이다. "인간이란 느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서로 이어지며 영구적인 흐름과 운동 안에 있는 상이한 감각들의 다발 또는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관념들의 흐름 너머에 그런 관념들을 총괄하는 자기동일적인 어떤 실체는 없다는 것이다. (흄이 의식에 주어지는 내용인 '관념'과 이런 관념들을 서로 관계짓는 '의식 형식'이 별개의 것이라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Output과 Black box를 개별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흄은 의식 형식이라는 것은 경험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에 허구라고 판단했지만, 칸트는 역발상으로, 그렇기 때문에 선험적이고 보편적이라고 주장했다. 역시 역발상은 참 효과적이면서도 중요한 도구이다. )  흄은 인간이 인과관계를 인식하는 것은 (개연적) 추론도 관찰도 아닌, 습관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건 A와 사건 B가 연달아 발생하는 것이 반복되면, 우리는 습관적으로 이 두 사건으로 부터 받은 인상과 그에 따른 관념들을 결합하여 인과 관계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인상 = input, 관념 = 마음 속의 output) ▣ 귀납 논증에 대하여흄에 의하면 귀납논증 Inductive Reasoning은 '관찰된 사실로부터 관찰되지 않은 사태를 추론'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감각과 기억을 넘어서는 행위'로 비판 당한다. 사건 A 뒤에 사건 B가 온다는 것을 아무리 반복적으로 관찰한다고 해도 그것이 일반적 법칙 (관찰되지 않은 사태) 이 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법칙 T는 그럴듯한 설명이 될 수는 있지만, 객관적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아니, 뭘 그렇게 꼬장꼬장하게 따지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이게 정론이다. 컨설팅을 할 때도 반드시 명심해야 할 의심이다.  흔히 바로 눈에 보이는 해답은 실제로 답이 아닌 경우가 많다. 물론 답인 경우도 많지만...특히 인간이 관련되면, 원인 결과가 쿠션을 몇번씩 먹으며 꼬여 있는 경우가 많다. 꼼꼼하게 살피지 않으면, '이만하면 되겠지'라는 마음이 큰 착각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 형성하는 습관 Custom 을 극복할 수 있어야 제대로 관계를 볼 수 있다.  
살펴 본 바와 같이, 흄의 공격은 결코 가볍지 않다. 논리적으로 잘 생각해 보면 매우 타당한 공격이기 때문이다. " 만일 우리가 예를 들어 신학이나 학교에서 배우는 형이상학 책을 손에 쥐고 있다면, 이렇게 물어보자. 그것이 양이나 수에 관한 추상적 추론을 포함하는가? 아니다. 그것은 사실과 존재에 대한 실험적 추론을 포함하는가? 역시 아니다. 그렇다면 그책을 불 속으로 집어 던져라. 왜냐하면 그것은 궤변과 환상 이외에는 아무 내용도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                                                                                               - 흄의 (두 갈래로 갈라진) 포크'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에 나오는 말이다. 추상적 추론, 실험적 추론과 같이 관념 간의 관계를 다루는 순수한 논증적 추론은 신뢰할만 하다. 그러나, 사실 관계를 다루는 개연적 추론은 신뢰하기 힘들다. 아무리 우리가 필연적 사실이라고 믿는 관념도 그 반대의 경우를 상상하여 명확하게 나타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개연적 추론의 유일한 예는 인과 추론이고, 그러므로 인과 관계는 확실하지 않으며, 의심의 대상이 된다. 이건 어떻게 보면 SW 프로그래밍과 대상물의 실질적인 움직임의 관계하고도 비슷해 보인다. 원래 물리적 움직임의 변화는 물리적으로 조정했었다. 자동차 핸들을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자동차가 오른쪽으로 움직이는게 그 사례이다. 그러나 자동차의 전장화가 진행되고 있는 지금, 스마트폰을 가지고서도 자동차의 동작 방향을 조정할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인 프로그래밍 언어의 규칙에 따라, 스마트 폰에서의 전기 신호가 자동차를 물리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그 가장 근저에는 On이냐 Off냐의 정보가 있다. 다른 말로 하면 0 이냐 1 이냐의 2진법이다. 이것들을 모아서 16진법이 되면 보다 복잡한 정보를 처리할 수 있게 된다. 논리의 세계인 부울대수를 기반으로 한 프로그래밍은 오류가 없이 짜여 졌다면 언제나 정확하게 작동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 상황에서는 언제나 문제가 발생한다. 신호의 차단, 잡음, 기계적 마모, 윤활유의 부족, 작동자의 미숙 등 그 요인은 무수히 많다. 추상의 세계가 현실의 세계로 확장되거나 접촉되는 순간, 오류의 가능성도 같이 들어 온다.  

 
전략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전략적, 논리적으로는 맞지만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말을 하는 것을 듣는 경우가 있다. 그것도 이런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질문이 큰 발전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흄의 질문은 큰 발전을 만든 좋은 질문이었다. 당연한 걸 가지고 왜 그렇게 따져? 별 걸 다 가지고 시비야... 이런 식으로 대응했다면 발전은 없었겠지만, 당시 유럽 철학계는 그 질문을 심각하게 접수했고, 칸트는 좋은 답으로 응수하는데 (상당히) 성공했다. 
※ 피시스와 노모스 관점에서 보자. 흄은 노모스가 어떤 절대적 근거를 가질 수 없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현실 세계를 주장하는 법률이나 관습은 매우 의심스러운 근거를 가지고 있고, 의심하는 것이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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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시스와 노모스

피시스 그리고 노모스 phýsis nómos; 기원전 4~5세기 경의 그리스에서 '최초의 철학자'가 '자연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로서 등장하였을 때, Physis는 '사물의 본질' 혹은 '만물의 생성/소멸의 근원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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