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주의

2015. 7. 17. 19:44철학

[ Deconstruction,  ]

 
 포스트구조주의의 문학이론으로 1960년대에 프랑스의 비평가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가 제창한 비평이론을 말한다. 주어진 것으로서의 전체성, 즉 신()이나 이성 등 질서의 기초에 있는 것을 비판하고 사물과 언어, 존재와 표상(), 중심과 주변 따위 이원론을 부정하고 다원론()을 내세운다.  (Naver 지식백과, 행정학 사전)


마카오 물쇼 'The House of Dancing Water'

 

해체주의는 문학이론만이 아니라, 사회학, 철학, 건축학, 패션 등 다방면에 걸친 하나의 흐름이다. 해체주의를 제대로 이해 하려면 먼저 서양 철학 전반에 대한 이해와 구조주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먼저 구조가 있어야 해체를 하든지 하지 않겠는가?)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해체주의와 마찬가지로 구조주의도 하나의 커다란 세계관이다. 구조주의의 대표적 인물은 레비스트로스 (슬픈열대),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푸코 (지식의 고고학, 감시와 처벌), 라캉, 알튀세르 등이다. 

 

1960년대~70년대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들을 중심으로 유행했으며, 마르크스, 하이데거, 프로이드 등 전대를 풍미했던 사상을 비판적으로 재해석 한다. 

 

구조주의의 시작은 소쉬르(Saussure, 1857~1913)의 언어학이라고 볼 수 있다. 소쉬르는 언어 현상에서 랑그 Langue와 빠롤 Parole 을 구분한다. 빠롤이 실질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라면, 랑그는 그보다 앞서 존재하며 빠롤을 생성시키는 언어능력 Competence에 해당한다. 랑그는 빠롤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나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이다. (언어 공동체의 규칙과 약속들) 여기서 랑그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비슷한 거라고 보면 된다. 어떤 이상적인 100%의 실체. 빠롤은 랑그를 기반으로한 다양한 사람마다, 상황마다의 변화이다. 

(이런 절대성을 전제하는 인식은 후기 구조주의에서 비판을 받는다.) 

 

소쉬르에 따르면 언어는 '관념을 표현하는 기호의 체계' 인데, 기호의 두가지 측면인 기표 Signifier와 기의 Signified 사이에는 어떤 필연적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과'라는 낱말은 (기표) 그것이 가리키는 '빨강 혹은 파란색의 어른 주먹만한 새콤 달콤한 과일이라는 실체' (기의) 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기표와 기의를 관계 맺게 하는 것은 언어 체계이며, 기호는 사물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언어 체계 안에서 다른 기호들과 관계를 맺는다. 랑그라는 구조가 있기 때문에 빠롤이라는 현상이 타나날 수 있는 거다.

 

레비스트로스 (Levi-Strauss, 1908~2009)는 인류학에 이러한 구조주의 인식과 방법을 적용했다. 그는 신화와 상징, 친족관계를 조직적으로 탐구함으로써 인류 사회, 인간 정신의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구조를 밝혀 내려고 했다. 역시 '절대성' 혹은 플라톤적 이데아를 전제로 한다.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 1915~1980)는 소쉬르의 기호를 영화, 식품, 패션 등 의미 작용을 발휘하는 모든 사회 문화 현상으로 확장 시켰다. 마르크스 주의자로서, 바르트는 신화를 기호의 2차 의미 작용 속에 내재한 이데올로기로 개념화 했다. 바르트에게 신화란 과거이든 현재이든 간에, 특정 시기에 지배집단으로 자리잡은 특정 사회 계층의 산물이다. 2차 의미 작용이란 것은, 기표와 기의로 이루어진 하나의 기호체계의 기표에 다시 기표와 기의가 자리잡는 것을 말한다. 1차 기호체계는 드러난 의미, 2차 기호체계는 함축된 의미라고 볼 수 있겠다. 1차 기호는 누구나 알고 있는 그냥 그대로의 이야기라고 한다면, 2차 기호란 것은 그 속에 숨어서 어떤 특정 집단의 이해와 철학을 대변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예를 들어 '국부 이승만'이라는 것이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고 있지만, 받아들여 진다면) 그것은 친일, 매국, 기회주의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데서 더 나아가 오늘날 한국의 발전에 대한 공을 모두 몰아주는 효과를 가지게 된다. 박정희 신화도 마찬가지. 

 

라캉 (Jacques Lacan, 1901~1981) 은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정신분석을 언어학 모델을 이용해 분석했다. 철학자가 철학적 진리 추구의 활동을 하게끔 이끄는 마음의 진리가 무엇일까? 그것은 그 자신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 (다른 사람들, 사회 환경, 즉 사회 구조)에 존재한다. 이 타자를 대표하는 것이 '언어'라는 상징이다. 언어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고, 우리는 소통하기 위해 언어의 규칙에 맞추는 수밖에 없다.

 

인간은 이상을 추구한다. 이상이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완벽한 '실재'이다. 이상은 사실상 현실에서 '늘' 결여된 어떤 것이다. 이 불가능한 '실재'에 이끌리는 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을 움직이는 욕망이다. 

 

무엇보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키보드를 치고 싶은 것이 바로 인간의 욕망인 것이다.  헤겔도 '정신현상학'에서 이러한 점을 지적했다. 인간은 자신이 주체가 되서 욕구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인정하는 어떤 것을 욕구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시대의 산물이며 사회적 존재이다. 여기에서 데카르트의 '주체'는 부정된다. 주체는 '상상된 자아', 상상을 통해 오인된 자아일 뿐이다. (라고 라캉은 주장하는데... 이게 꼭 맞는 것은 아니다. 라캉이 그렇게 주장한 것일 뿐.. 데카르트랑 붙여 놓으면 아마 박터지게 싸울 것이다. 둘 다 프랑스 사람이니까 아주 열띤 토론이 가능하지 않을까?) 

 

라캉 왈: '나는 내가 생각하는 곳에 존재하지 않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 

 

그게 무의식일 수도 있지만, 그 무의식은 결국 타자에 의해 지배 된다는 것이다. 주체의 참다운 위치는 내 밖에 있는 객관적 질서 속에 있다. 역시 어떤 절대적인 체계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구조주의. 

 

알튀세르하고 푸코는 다음 기회에... ;;; 

(특히, 푸코는 후기 구조주의이므로 성격이 많이 다르다. 절대가 아닌, 상대적 세계로 옮겨가 버린다.)

 

어쨌든, 여기까지 이해 했다면, 구조주의가 어떤 것인지 대충 감이 잡힐 것이다. 

 

구조주의는 언어학의 개념에서 출발하여 언어와 기호에 대한 탐구로부터 인간의 사회와 문화에 대한 탐구로 영역을 넓히면서 랑그에 해당하는 법칙과 체계를 밝히고자 했다. 

 

언어는 인간 정신의 구조적 측면을 가장 잘 나타내 줄 뿐 아니라 문화와 관계가 깊고,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사고방식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꼭 이렇지는 않다. 사고 방식이 그렇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형태의 언어를 쓰는 것일 수도 있다. 이건 마치 닭/달걀 순환론과 같은 구조... 구조주의는 언어가 사람을 규정한다고 하지만, 반대로 사람이 언어를 규정하기도 한다. 안 그러면 언어가 왜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하겠는가? 사회라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 모인 군집이고, 어떤 한 사람이 큰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모든 것은 양면적이다.) 

 

어쨌든, 구조주의는 인간 주체에 앞선 '구조'를 강조함으로써 실존주의 등 인간 중심적인 사유와 대립하면서 20세기의 대표적 사상이 되었다. (..고 한다. 인터넷 두산 백과에 의하면...)

 

후기 구조주의는 포스트 모던하고 일맥상통하는데, 상대주의라고 보면 된다. 

구조주의가 선험적, 보편적인 구조를 강조했다면, 후기 구조주의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특이성을 끌어들여 상대성을 강조하게 된다. 구조주의가 전 시대의 절대주의와 차별화되는 점은 절대성을 인간 내부가 아니라 외부의 구조에서 찾았다는 점인데... 결국 다시 상대주의의 십자포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근본적 한계가 드러난다. 특히나, 외부의 구조라는 것이 상대주의에서 갈고리를 걸기 딱 좋은 것이다 보니, 필연적으로 후기 구조주의로의 전개가 예측이 되었던 상황. 물론 다 지나놓고 보니까 이렇게 보이는 것일수도 있지만... 

 

구조주의의 한계는 주체와 타자의 이분법이라고 하는데, 주체를 통제하는 타자의 구조에 주목한 것이 구조주의. 

후기 구조주의는 주체와 타자의 '관계'에 촛점. 왜냐하면 '타자'라는 것은 이상적인 실재가 아니라 주체가 해석한 어떤 이미지에 불과하므로. 

그래서 후기 구조주의에서는 타자를 정의하려 하기 보다는 해석하려고 한다. 객관적인 실체가 아니므로 해석이 최선이라고 보는 이런 관점이 바로 상대론. 

 

구조주의의 한계를 벗어나려면 다시 주체를 파고 들던지, 아니면 아예 더 멀리 막나가던지 해야 하는 상황에서 ... 해체주의는, 이 두가지 방법을 동시에 시도한다. 멀리 막 나간 다음에 다시 추스려서 새로운 주체적인 판을 만드는 것이다. 이 정도까지 하면, 사실 그 다음에 뭐가 또 오기도 좀 그렇다.

 

자.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서양철학의 이해는 절대와 상대의 싸움이며, 로고스 Logos (이성) 로 표현되는 절대의 힘을 중심으로 상대주의가 잽이나 어퍼컷을 날리며 맴도는 상황이라고... 간단히 이해하고 넘어가자. 구조주의 설명하다가 너무 지쳤어...) 

 

해체주의란 그럼 무엇인가? 

 

해체주의의 대표적 저작은 데리다 (Jacques Derrida, 1930~2004)의 '그라마톨로지'이다. 데리다는 이 책에서 루소와 루소를 정신적 스승으로 여긴 레비스트로스를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결국, 해체주의도 넓게 보면 포스트 모더니즘의 하나다. 

 

상대주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원론을 넘어선 다원론이다. Logs 외에 다른 배타적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원론)을 넘어서, 개개인의 개별적 판단의 독립성과 의미를 중요시한다. 

그러나 해체주의는 결국 절대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out of square 방법론적 성격을 띄기도 한다. (이해하기 나름... ) 

 

데리다는 서구 사상과 특히, 구조주의에서 상대적으로 경시된 '문자'를 탐구하여 서구사상의 해체를 시도한다.  

 

'태초에 말씀 Logos이 계시니라. (요한복음 1장 1절)' 

여기서 말씀은 다른 말로 예수님을 의미하며, 진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음성 언어의 절대적 지위가 여기서부터 나온다. 4대 복음서도 결국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고, 구약 성경도 하나님의 다양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나머지 신약은 대부분 편지인데...?  

로고스는 태초의 혼돈에 질서를 부여한 이성이고, 근본적인 기준이 된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이렇게 기독교 신학으로 녹아들게 된다.) 

 

루소는 문자 언어에 대한 음성 언어의 우위성을 설파한다. 레비스트로스는 보다 급진적으로 '문자 언어 자체는 그 기원부터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에 토대를 둔 사회와 끊임없이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표현한다. 문자를 아는 것이 권력이며, 문자의 간접성이 음성의 현존성 (순수성과 절대성으로 해석되어지는 현존성)을 해치는 것이다. 다시 기표와 기의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아뭏든 현존하는 음성의 전달력보다 문자의 전달력이 떨어지고, 오해의 소지도 훨씬 많은 것은 사실이다.  (단, 여기서 전달력이란 동일 시점에서의 전달력을 말한다. 시간과 공간을 고려하면 문자의 전달력은 엄청나게 확장되어, 음성을 가볍게 넘어선다. 책은 그 파급력에서 보면 말도 안되는 High Technology다. 심지어는 동영상도 아직 책의 효과성과 파급력을 넘어서지 못하고, 보조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기술이 더 발전하여 마치 눈앞에서 보는듯한 영상이 가능해 진다면 다시 로고스의 힘이 뻗치는 상황이 될 수도 있겠지만...) 

 

아뭏든 이렇게 뿌리깊은 문자 언어에 대한 음성 언어의 우위성은, 한자같은 상형 문자보다 알파벳같은 표음 문자가 더 우수하다는 결론으로까지 이어지고, 중국보다는 역시 유럽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 논리를 더 확장하면 한글이라는 완벽한 표음 문자를 가진 대한민국이 세계 최고... ;;; )   

 

데리다는 남비콰라족에 문자가 들어오면서 생긴 부정적 변화를 기술한 레비스트로스의 연구에 의문을 제기한다. 레비스트로스가 얼핏 보면 제 3세계 국민들의 편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근저에는 서구 중심주의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데리다 왈: "서구 사상의 장, 특히 프랑스에서 지배적인 담론 (아마도 구조주의)은 오늘날 너무 성급히 자신이 뛰어넘었다고 주장하는 형이상학 (로고스 중심주의)에서 그 성층화의 한 단층에 의해, 때로 가장 풍성한 형이상학의 단층에 의해 사로잡혀 있다." 

 

구조주의는 중심을 외부의 구조로 옮김으로써, 로고스를 뛰어넘은 것처럼 보이지만 외부의 구조 자체가 로고스가 됨으로서 결국은 로고스의 체계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이데아, 혹은 순수성에 대한 추구는 극단적으로 히틀러의 아리아 민족주의로 나타나고 유대인 대학살을 불렀다. 2차 세계 대전의 반성으로 나타났다는 구조주의도 얼핏 보면 그럴 듯 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말한다. 애초에 모든 민족은 문자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 

 

'문자'라는 것은 '대리보충 supplément'의 논리, 혹은 사후성 (性)nachträglichkeit 의 논리이다. 기원 (원본: 여기서는 Logos라고 봐도 된다. 이상적인 원래의 뜻)은 흔적 (문자 trace, 에끄리튀흐 écriture) 에 의해서 대리되고 보충되는 '이차적 첨가물'이라는 것이 이 논리의 기본이다. 

 

아.. 더럽게 어려운 이야기인데, 다시 설명해 보면, 문자라는게 꼭 ABCD, 가나다라 같은 형태로만 있는게 아니라, 원래의 Logos를 대리보충 하거나 사후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다 '문자'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레비스트로스가 연구했던 남비콰라족에도 문자가 있었는데, 그가 그 단어를 '글을 쓴다'는 의미가 아니라 '선을 긋는다'는 의미로 축소해석해서 졸지에 문자가 없는 부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레비스트로스의 연구는 목적을 위해 data를 취사선택 내지, 왜곡한 Case라는 비판. 

 

기원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게 이상적이고 순수한 것이라면, 그것은 흔적이라는 것을 통해서만 나타내질 수 있으므로, 기원은 흔적에 의해 그 나타남이 무한히 연기 différé 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차연 différance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차이+ 연기를 조합한 데리다만의 표현인데, 차이 difference와 연기 differ를 합쳐서 e대신 a를 사용했다. 이 차연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 바로 대리보충이다. 

 

기원이란 것과 흔적이란 것이 (다를 수밖에 없지만) 어떻게 다른가? 그것을 보다 분석적으로 표현한 단어가 바로 차연인 것이다. 오리지널 원본과 그 대체재 혹은 보완재는 '상이'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차이'가 있다는 의미에서 다르고, 오리지널은 현실화 하지 않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에 (물론 현실화 할 수 있다는 희망은 품고 있지만...) '연기'된다. 이 두개를 합치면 기원과 흔적의 차이를 좀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결국, 기원은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 라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기원의 진실은 비기원인 것이고, '차연이 근원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기원이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째, 플라톤의 이데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에 기시감이 든다. 

 

서구의 기본적인 사유는 혹은 철학은, 대리보충을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땅에 왔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격이고 동일한 분이지 대리보충이 아니다. 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로고스적인 이성은 서구의 사유의 울타리 안에서는 대리보충이라는 것을 생각해 낼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을 인정하는 순간 상대주의의 늪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절대주의의 가장 큰 약점은 변하지 않는 근거를 제시할 수 없다는 점이다. 반면 상대주의의 가장 큰 약점은 뭔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결국 발전은 절대주의와 상대주의가 서로 상호 보완적으로 역할을 해주면서 새로운 길을 제시할 때 가능하다. 그리고 이런 대립을 꼭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이런 상호 공격과 비판을 통해서 서로 이질적인 두 관점이 상호 이해하게 되고 더 구조적으로 끈끈하게 연결될 수 있다는 측면도 봐야 된다. 

 

로고스적인 이성은 '믿으면' 대리보충이 필요없다. '믿지 않으면'? 어떤 것도 설명할 수 없다. 그래가지고서는 대화 단절이다. 그래서, 해체주의에서는 로고스가 있다고 치자. ... 라고 한다. 그런데 그게 보이지 않잖아? 꼭 있을 것은 같은데 말이지.. 그걸 '대리보충'이란 개념으로 설명하자. 이렇게 된거다. 그래서 이게 꼭 논리적이만은 않다. 역시 진리는 논리적이지 않은 거였어. 해체주의의 기본 특성은 이러한 모순성이다. 상당히 진리에 근접한 이론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해체주의는 대리보충이라는 개념을 통해 현실을 이해한다. 

다른 말로, 순수한 기원은 없고 흔적(문자 또는 텍스트)의 기능만 있다. 이것이 바로 “‘텍스트를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이란 없다 Il n'y a pas de hors-texts ”라는 유명한 말의 뜻이다. 

 

풀어서 써도 어려운 것 같긴 하지만... 

그렇다면, 이런 해체주의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가 선입견을 가지고 파악한 세상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라는 것이다. 구조주의는 외생적인 환경의 영향력을 절대시 한다. 구조주의에 의하면, 인간은 거기에 따라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프레임과 현실은 이미 어떤 이해집단과 어떤 관점에 의해 왜곡된 것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오리지널이 아니다. 내게 가장 적합한 관점은 내가 구축해 가는 수밖에 없다. 이게 개인적 판단의 의미와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는 다원론이다. 그러나 내 관점은 필연적으로 보편 타당성을 확보해야 효과적일 수 있다. 이게 해체주의의 절대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방법론적 성격이다. 

 

해체주의는 무엇을 해체했는가? 서양사상을 대대로 관통해온 로고스 중심의 사유를 해체했다. 단, 성공했는지는 모르겠다. 문자는 음성보다 열등한 보완재가 아니라, 병행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적 실체이다. 이것도 충분히 비판 가능하다.  왜 문자의 실재와 역할에 대해 그렇게 집착했는가? Logos로 상징되는 절대성을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공격만 한 것은 아니고 적절한 타협도 병행했다. 공격의 장소는 루소와 레비스트로스, 음성 언어와 기호 문자였지만 실제로 타격한 곳은 서양의 중심 사상이었다. 꽤 날카로와 보이는 공격이었지만, 지나놓고 보니 그리스 시대부터 이어진 절대 vs. 상대 논쟁의 연장선상에 있는 한 패턴이라는 판단도 들고, 결국은 명칭에서 연상되는 어감과는 달리 (절대주의의) 해체 보다는 보완 내지 발전을 위한 도구가 되지 않았는가 싶기도 하다. 

 

다시말하지만, 상대주의의 한계는 뭔가 발전적이지가 않다는 점이다. 시대 정신은 항상 절대 주의 계열에서 나올 수 밖에 없다. 물론, 상대 주의 계열의 참신한 공격을 제대로 소화 했다는 전제를 가지고. 

 

데리다 위주로 봤는데, 들뢰즈는 시간 날때 다시... 

 

네이버의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88&contents_id=5068 네이버 캐스트 철학의 숲에서 자크 데리다 편을 비롯해 많은 것들을 참조해 가면서 내 생각을 정리해 봤다.  

 

자크 데리다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의 해체주의를 대표하는 작품 [그라마톨로지(문자론)](1967, 김성도 옮김)는 루소와 루소를 자신의 인류학적 연구에 영감을 불어넣는 스승으로 여긴 레비스트로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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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일부 오자가 있어서 수정했는데, 오래 전에 써서 어디까지가 가져온 글이고 어디까지가 내 글인지 햇갈린다. 

단, 내가 쓴 글의 분량이 훨씬 적다는 것은 확신한다. 

논문이 아니라 그런 부분을 자세히 구분하지는 않았는데, 인터넷에서 글들을 가져오면서 내 해석을 덧붙인 그런 글이다. 내 나름대로의 관점과 해석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건 지금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