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철학] 키에르케고르, 그리고 번역

2013. 5. 25. 12:23철학

 

 

 

다음은 키에르케고르의 대표작 '죽음에 이르는 병'의 첫머리다.

('철학입문' p140~, 중원문화신서, 황세연 편역)

 

 


 

인간이란 정신이다. 그러나 정신은 무엇인가? 정신이란 자기이다. 그러면 자기란 무엇인가? 자기란 관계 그 자체에 관계하는 인간의 관계이다. 또는 자기는 관계가 관계 그 자체에 관계하는 관계 속에서의 관계이다. 자기란 관계가 아니라 관계가 관계 그 자체에 관계하는 것인 것이다. 인간은 무한성과 유한성,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 자유와 필연성의 종합으로서 결국 하나의 종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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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물(物) 사이의 관계에서 관계는 소극적인 통일로서 제 3자이며, 두개의 물은 관계에 관계하고 또 관계 속에서 관계에 관계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혼의 규정 아래에서는 영혼과 육체 사이의 관계가 하나의 관계인 것이다. 이에 반해서 관계가 관계 그 자체에 관계하는 경우에는 그와 같은 관계는 적극적인 제 3자이며 그것이 바로 자기자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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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같은 관계, 그 자체에 관계하는 관계인 자기는 스스로 자신을 설정했는가, 그렇지 않으면 어떤 타자에 의해 설정되었는가의 양자간에 어떤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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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그 자체에 관계하는 관계가 어떤 타자에 의해 설정되어 있다면 '이' 관계는 물론 제 3자이지만, 이 관계, 이 제 3자는 다시 하나의 관계이며 전체 관계를 설정한 것에 관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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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같이 파생적으로 설정된 관계가 인간 자신이며, 그 관계는 관계 그 자체에 관계하고 또 관계 그 자체에 관계함으로써 타자에 관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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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갔다.

그러니까... 이해가 될 듯 말 듯 하는데, 결국은 뭔가가 살짝 모자라서 이해가 안되는 그런 상태였다는 말이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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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인간은 관계로 말미암아 진정한 자신 곧 자아에 이르며 이 관계는 단순한 관계 그 자체가 아닌 자신이 자신에게 관계되는 관계를 말한다. 이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서 관계 이전에는 대상이 없었다는 가정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교수님께서는 보다 세부적인 가정을 제시해 주셨는 하나는 관계 순간 두 대상이 성립하는 경우와 다른 하나는 관계가 이미 존재한다는 가정이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다음 문장에 착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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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relation between two, the relation is the third term as a negative unity, and the two relate themselves to the relation,; such a relation is that between soul and body, when man is regarded as soul. If on the contrary the relation relates itself to its own self, the relation is then the positive third term, and this is the self.

곧, 영혼과 육체같이 관계가 이미 존재하는 경우는 소극적인 통합으로 관계가 이미 존재한 경우이다. 이에 반해 자신이 자기 자신과 관계 맺게 되는 것이 적극적인 통합으로 관계 맺는 순간 대상이 성립하는 경우이다. 키에르르케고르는 이와 같은 경우를 ‘자아’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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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이디어에 따르면 무한과 유한, 영원과 시간, 자유와 필연등은 이미 관계가 존재하는 ‘negative unity(소극적 통합)'이다. 이로서 키에르케고르가 SUD첫 장에서 제시한 인간에 대한 ‘종합’의 정의는 이미 존재하는 관계들을 뜻함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이미 존재하는 관계들이 아니라 관계를 통해 비로소 대상이 성립되는데 있다. 하지만 이미 존재하는 관계가 관계를 통해 대상이 성립하는 경우와 무관한 것은 결코 아님을 아래 문장을 통해서 알 수 있다.

Man is a synthesis of the infinite and the finite, of the temporal and the eternal, of freedom and necessity, in short it is a synthesis. A synthesis is a relation between two factors. So regarded, man is not yet a 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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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인간이 종합이란 뜻은 이미 존재하는 관계들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관계 순간 대상이 성립하는 인간의 ‘자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미 존재하는 관계를 부단히 참고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미 존재하는 대상을 ‘神’이라는 개념으로 단순화 시키는 것은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후 제기된 문제 자체를 사라지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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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한 ‘종합의 인간’에 대한 정의에서 키에르케고르는 ‘무한, 영원, 자유’와 ‘유한, 시간, 필연’을 서로 비교하고 있다. 이때 전자와 후자는 서로 대립되는 개념으로 있으며 전자와 후자는 서로 공통적으로 대립되기도 한다. 무한, 영원, 자유의 공통점을 초월성(超越性)을 지닌 개념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는 초월성에 포함된 의미 그대로 대상이 없는 대상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유한, 시간, 필연이 대상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시/공간적으로 정해지지 않는 다는 뜻이다. 이러한 개념에 비추어 볼때 키에르케고르의 자아는 비초월적인 존재로써의 자신이 초월적인 존재로써의 자신과 관계 맺는 존재라고 말 할 수 있다. 이때 인간을 비초월적인 존재에서 초월적 존재로 그 운동성을 밝힌 이유는 비초월에서 초월로 향하는 것이 인간존재의 상승이라는 키에르케고르의 ‘절망의 가능성과 현실성’에 기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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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읽어 보면 (빨간색으로 표시한 부분) 매우 명확한 흐름이 보인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을 반대적인 속성들의 결합으로 보았고 그것은 단순한 '종합'일 뿐,
아직 '자아'는 아니라고 했다.

그 다음의 부연 설명이, 두 개의 대상이 관계를 가질 때, 이 때의 '관계'는 부정적(수동적) 결합을 의미하는 제 3자적인 용어이고, 그 예는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나누었을 때 그 둘의 관계를 인간이라고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관계가 그 관계 자체를 관계 시킬 때 (즉, 관계의 대상이 내부적으로 향할 때. 예를 들면, '내가 인식하는 나'와 '원래의 나' 사이의 관계) 는 이 '관계'는 긍정적(능동적)인 제 3자적인 용어이고 '자아'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So, regarded, Man is not yet a self. 라는 부분은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 번역에서는 아예 빠져 있다. (원서를 안 봤으므로... 이게 번역자의 친절한 설명인 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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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뭏든, 난 도대체, 번역자가 자기도 이해 하면서 번역을 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런 번역들이 우리를 철학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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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부분에 대한 다찌바나 다카시의 글과 그 번역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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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정신이다. 정신은 무엇인가? 정신이란 자기이다. 자기는 무엇인가? 자기란 자기 자신에 관계하는 바의 관계다. (중략) 즉, 관계라는 것은 관계가 자기 자신에 관계하는 바의 관계를 포함한다. 그래서 자기란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 관계가 자기 자신에게 관계하는 바의 관계이다. 인간은 유한성과 무한성, 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 자유와 필연의 종합이다. (중략) 종합이란 두 가지 사이의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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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쉽고 명확하다. (아주 조금..^^ ;;; )

자기 자신에게 관계하는 바의 관계란 추측컨대, 영어로

the relation relates itself to its own self

일 것이다. 관계를 관계 그 자체의 어떤 실재와 '관계'되도록 하는 그 '관계' 말이다. itself와 own self는 다른 개념이지만 동시에 같은 개념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나, (내가 보는 나), 실재의 나에 대입시켜 보면 이해가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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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치바나는 대학교 1학년 때 이 글을 처음 보고 '쿵!'하고 얻어맞는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장담컨대, 한국어로 된 저 번역을 보고 '쿵!'하는 기분을 느낄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내가 너무 과소평가 한 것일까? ㅋㅋ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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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쿵!하는 기분이 들었냐를 유추해 보면, 인간에 대한 명확한 정의와 그 단순함에 깃든 심오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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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계에 관계하는 것 (두 객체 사이의 관계)

2. 관계 그 자체에 관계 하는 것 ( 외부와의 관계를 해석하는 내부의 동적 스키마)

이 두가지의 차이를 이해 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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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의 경우,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인 것은 맞다. 그러나 1번의 관계만이 있다면 그것은 '자아' 혹은 '자신'이 아니다. 단순한 결합 (synthesis) 은 두 요소의 합을 말하며 이것은 아직 '자아'라고 부를 수 없다. 합에 대한 나름의 해석이 가능하게 하는 것( 관계 그 자체에 관계하는 것) , 이것이 자아이다.

즉, 단순한 결합(관계)과 그 결합을 포괄하는 제 3의 실체는 아직 자아 (혹은 온전한? 인간)가 아니다.

그 결합 (관계)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자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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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설명하면,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나누어 볼 때, 그 둘을 합친 것을 인간이라고 볼 수 있느냐라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을 '자아'와는 구별하고 있다. '나'를 '나'이게 하는 독특성- 이것은 단순히 영혼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의지적인 활동이다. 나의 의지이건, 제 3자의 의지이건. - 이 존재해야 '자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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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자아 (자기, Self) 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이다. 여기서 굳이 제 3자의 의지가 나온 건, 그런 의지가 신이란 존재 (제 3자)를 가정하지 않고 발현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의지라고 보면 이건 인간중심주의가 되고, '제3자'의 의지라고 보면 종교나 더 높은 초월적 존재에 대한 인정이 되는 것이다. (기독교가 지배하던 당시 시대상을 고려해 보자.)

결국, 단순 결합이 아닌 해석이 바로 자아의 특징인 셈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던 or 세상에 표현할 수 없었던 '나'의 의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고, 이는 신과의 결별 혹은 신의 부재를 내포하고 있어 고독과 우수를 필연적으로 수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어버이처럼 나를 지켜봐 주고 보호해 주는 존재가 있다고 믿었는데 갑자기 그 존재가 사실은 존재하지 않거나 나와 그런 관계가 아닌 것을 깨달았다고 생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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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그 자체로 탐구한게 아니라 관계성에서 탐구하고, 그러면서도 자아라는 독립성을 찾아낸 것은 참 독특한 접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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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키에르케고르의 생각은 세계관에도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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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석이 들어가는 '나'를 제외하고 성립되는 객관 세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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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를 인정했을 때, '내'가 파악하는 관계에 의한 세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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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의 내부로 들어가 '자아'의 본질적인 특성을 파악하고 이를 통해 바라보는 세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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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두 가지는 '자아'를 통해 바라 본 세계가 아니라 일종의 '거기 존재하는' 세계이다. 1의 경우 '나'는 단순한 관조자에 지나지 않고, 2의 경우 나는 '행동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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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의 경우는 '자아'에 의해 파악되는 매우 주관적인 세계로, 이성과 논리만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세계이다. 이것은 내가 '자아'를 자각했을 때 성립된다. '관계 그 자체에 관계하는 관계'의 세계인 것이다. '나'는 '나를 보는 나'와 '나에게 보여지는 나' 로 나뉘어 지고, 이 둘의 관계성에서 '나'를 보면 다양한 모순과 이율배반이 나타난다. 이 둘은 관계 그 자체에 관계하는 관계 혹은 자아에 의해 통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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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케고르

(Kierkegaard, 1813~1855: 덴마크) 를 실존주의 철학의 시작으로 본다.

그 이유는 상술한 바와 같은 개개인의 독자성에 대한 기본적인 시각, 즉 '여기의 현실적인 상황속에서 살고 있는 나'를 치열한 현실인식 속에서 제기하였기 때문이다.

실존 (existentia) 은 본질적 존재를 의미하는 essentia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만들어졌다. 즉, 인간은 본성상 일반적인 원리로부터 합리적이고 필연적으로 이해될 수 없으며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으로 개별적으로 이해 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실존 사상가들에게 사상은 자신의 현실과 결부된 것이어야만 했으며 따라서 자기완결적인 전체지(全體知)나 순수한 이론체계로서만 존재할 수는 없었다. 키에르케고르의 경우는 이 것이 '어떻게 하면 진정한 기독교도가 될 수 있는가?' 였다. 같은 실존주의라고 해도 사르트르의 완벽한 무신론과는 극과 극에 있어, 역설적으로 실존주의의 개별적인 속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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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냐 저것이냐'에 나타난 인간 실존의 3단계:

1단계: 미적 (감각적) 단계

감각적 쾌락을 쫓아 사는 단계. 결과는 권태와 절망 뿐. 결코 행복해 질 수 없음.

2단계: 윤리적 단계

인간으로서 지켜야 하는 보편적 가치와 윤리에 따라 생활함. 결단하고 책임지는 삶. but 언젠가 죽고 만다는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함

3단계: 종교적 단계

스스로의 결심에 따라 진정으로 신을 믿고 따를 때, 무력감과 허무감을 떨쳐 버리고 완성된 삶을 살게 됨.

 

단계별 상승은 '자기 자신의 주체적 결단과 도약'에 의해서만 가능함. 키에르케고르가 보기에 당시의 사람들은 (요새도 마찬가지겠지만) 자신들이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이유를 주변에서만 찾으려고 했다. 여기에 대한 비판이 바로 인간은 '신 앞에 선 단독자'이므로 자기 삶의 책임은 자기가 질 수 밖에 없다는 그의 철학 체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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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그의 인생관앞에서... 1837년 25살때 당시 14살이던 소녀 레기네 올센과의 만남과 사랑은 비극적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1841년 29세에 약혼을 파기하고 방황의 시간을 가진다.

(또 우울해진다.. ㅡ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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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케고르는 헤겔을 격렬하게 비난했는데 (참고로, 기성 교회의 세속성에 대해서도 엄청난 맹공을 퍼부었다.) 이는 단순한 사고 내에서 인간의 문제가 설명되고 해결되는 듯이 생각하는 지성의 교만과 인간적 현실의 망각을 그가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사상의 특징은 강한 자기의식깊은 우수이다.

그의 아버지가 엄격한 기독교적 교육을 실행하였으면서도 소년 시절에 유틀란드의 광야에서 배고픔과 추위에 지쳐 하나님을 저주했었다는 사실과, 키에르케고르 자신이 결혼도 하기 전에 당시 하녀였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을 알게된 그는 (어린 소녀와 사랑에 빠졌던 그 무렵이다. 선후 관계는 알 수 없으나.. 이 것이 그 일반적이지 않은 사랑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은 유추해 볼 수 있다.) 강박적인 죄의식에 평생을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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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신은 34살을 못 넘기고 죽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고 한다. (실제 나이 42세 때 갑자기 거리에서 쓰러져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