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독은 오보 때문?
정확히는 틀린 말이지만, 그래도 몇 개월 혹은 며칠이라도 더 단축시킨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일 것이다.
역사를 보면 그럴 분위기가 조성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우연이 큰 역할을 하게 되는 경우가 다수 있다.
혹은, 어떤 경우에는 우연이 전혀 다를 결과를 가져 오기도 한다.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현지인 정찰꾼에게 어떤 질문을 했고 거기에 근거해 진격 명령을 내렸는데, 현지인의 답을 거꾸로 이해했기 때문이었다는 말이 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그곳에서는 부정의 뜻이었다나? 뭐 나도 세월의 저편에서 기억을 끄집어 내온 것이니까 틀린 것일 수도 있지만...
너무 일찍 포기할 필요도 없고, 너무 성공을 자만할 수도 없는 이유이다.
독일이 2일(현지시각) 수도 베를린과 브레멘 등지에서 통일 20주년 기념 축제를 시작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자 동서독은 이듬해 8월31일 볼프강 쇼이블레 당시 서독 내무장관(현 재무장관)과 귄터 클라우제 동독 국무장관의 서명으로 통일조약을 체결했고 그 후 5주 만인 10월3일 통일의 대업을 이룬다.
10월 3일은 이후 공식 국경일로 지정됐고, 올해로 독일은 통일 20주년을 맞았다.
세계사의 획기적 전환점이 된 독일 통일의 결정적 계기가 당시 동독 대변인의 말실수와 이탈리아 기자의 오보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당시 유학생으로서 베를린에 체류했던 명지대 김정운 교수는 자신이 직접 체험한 통독의 순간을 이렇게 설명한다.
1989년 11월 9일 저녁 동독 정부는 여행자유화에 대한 정책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연다.
여행자유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계속되자 동독 정부는 시위대를 달랠 정책을 발표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는 것.
당시 동독 공산당 정치국 대변인 귄터 샤보브스키(Schabow-ski)는 회견에서 동독인들의 해외여행 절차를 간소화하는 행정 조치를 발표할 계획이었다.
주변국 외에 동서독 국경을 통한 출국도 가능케 한다는 내용으로 확산되는 시위를 무마하려는 의도였다. 이전의 정책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고 여권 발급 기간을 단축한다는 내용이 새로울 뿐이었다.
하지만 대변인 샤보브스키는 새 정책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회견장에 나섰다. 그는 당 지도부가 새 여행 규정을 결정하는 동안 휴가로 자리를 비웠다가 기자회견 당일에야 문서를 건네받았다.
그가 여행 자유화에 대해 설명하자 기자들이 벌떼처럼 질문을 던졌다.
“의미가 뭔가” “언제 발효되나” 등등 쏟아지는 질문에 그는 당황했다. 마침 한 이탈리아 기자가 정책이 언제부터 유효한지 물었다. 새 정책에 대해 별로 아는 바 없던 그는 들고 간 문서를 정신없이 뒤적이며 아무 생각 없이 “지금부터 바로!”라고 답변했다.
그의 즉석 답변에 귀를 쫑긋 세운 기자들은 발표 내용이 국경 개방을 뜻하며, 그것도 즉시 효력이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정작 독일기자들은 별 내용이 없는 여행자유화 정책에 시큰둥해 했다. 그러나 독일어에 서툰 이탈리아 기자는 상황을 오해하고 본국으로 급전을 쳤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그러자 이를 지켜본 미국기자들도 덩달아 “내일부터 당장 동베를린 사람들이 베를린 장벽을 통과할 수 있다”고 전했고 이날 밤 서독 TV는 외신을 짜깁기하여 “동독이 드디어 국경을 개방했다”고 애매한 보도를 내보냈다.
TV 뉴스를 본 동독 주민들이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갔다. 국경수비대가 저지했지만 동독 주민들은 “뉴스를 듣지도 못했냐”고 오히려 따졌다. 혼돈에 빠진 국경수비대는 시민들과 옥신각신하던 끝에 결국 검문절차를 포기하고 국경을 개방했다. 동독주민들이 장벽을 올라타 넘어가기 시작했고 흥분한 일부 주민들은 도끼, 망치를 들고 나와 아예 장벽을 부수기 시작했다는 것. 역사적인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김 교수의 이 같은 설명 내용에 대해 서방 언론도 확인보도를 했다. 지난 해 월스트리트 저널은 급작스런 장벽 붕괴를 촉발시킨 진짜 주인공은 ‘동독주재 서방 매체 기자들’이라는 추적보도 기사를 게재한 바 있다.